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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종엽 - 상속의 열정. 삼성, 청와대, 땅콩 회항…

irene777 2014. 12. 27. 17:21



상속의 열정. 삼성, 청와대, 땅콩 회항…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 한겨레신문  2014년 12월 24일 -



▲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다사다난.” 세월호 참사에서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이르기까지 그 말이 전혀 상투어가 아닌 2014년이다. 그런 한 해를 보내며 짚을 일이 많지만, 그중 하나는 이건희 회장의 세 자녀가 삼성에스디에스와 제일모직 상장으로 10조원에 이르는 차익을 거둔 일이다. 1996년 삼성 에버랜드(현 제일모직)의 전환사채 저가 배정과 1999년 삼성에스디에스 신주인수권부 사채 저가 배정에서 시작된 상속 프로젝트가 일단락된 것이다. 와병중인 이건희 회장의 삶을 묘사할 길은 여러 갈래겠지만, 상속세와 증여세를 피해 세 자녀에게 기업 지배권을 고스란히 물려주려는 상속의 열정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려주고자 한 부의 크기가 대단했던 만큼 제도의 허술함을 파고든 것을 지나 그것을 일그러뜨리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 이 회장을 두고 “자식에게 물려줘서 뭐할 거냐”고 힐난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면, 상속 과정의 불법성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많아도 그 동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상속의 열정이라는 면에서 우리 모두가 이 회장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아닐까? 재벌 회장에서 가난한 자영업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재산 아니면 학벌·학력이라도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애쓰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심성의 밑에는 식민지, 전쟁 그리고 분단의 경험이 깔려 있다. 공적 삶이 불온함의 위험 아니면 사적 이익 추구로 양분되어버린 경험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적 삶을 생로병사의 자연적 리듬이 지배하는 곳으로 내버려두고 존재의 중심 의미를 공적 영역에서 찾는 태도가 잘게 부서져 버린다. 게다가 뒤이어 급속하게 진행된 자본주의적 발전은 그런 가치관의 잔여마저 맷돌처럼 갈아버렸다. 그 결과 개인은 무도덕적 가족주의 속으로 퇴행했고 유한성을 넘어선 삶을 향한 비전은 상속의 열정으로 오그라들었다.


‘정윤회와 십상시 관련 청와대 보고서’가 언론에 보도되어 온 나라가 시끄러웠는데, 그 와중에 정윤희씨 딸의 체육특기자 대학 진학에 박근혜 대통령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듯이 행동한 일 또한 보도되었다. 대선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내겐 자식도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런 말을 한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상속의 열정이 야기해온 많은 문제들을 염두에 둔 것일 게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이 제 자식도 아니고 지인의 자식 대학 진학에 그토록 막대한 권력을 꼼꼼하게 챙겨 휘두른 듯이 보이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지인의 상속을 향한 열정에 대한 깊은 공감이 아니고서 말이다.


‘땅콩 회항’ 또한 이런 일들과 그리 멀리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조현아씨의 행태는 상속의 열정이 어떤 심성을 가진 자녀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거니와, 조현아씨가 국토교통부에 조사를 위해 출두할 때, 조양호 회장이 했던 사과 성명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식의 잘못을 자신의 부덕의 소치로 돌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깊은 자정(慈情)의 발로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식이 마흔이 넘은 대기업 임원이라면, 그건 자식이 내딛는 발걸음마저 디딤돌을 놓으려 하고 더 나아가 자식의 묫자리마저 챙겨줄 듯이 부풀어 오른 상속의 열정의 징표이다.


지난 정기국회에서 연간 매출 5000억원 이하 중견·중소기업의 소유주에 대한 상속·증여세 부담을 완화하는 법안이 부결되었다. 2000개 정도의 기업을 제외한 우리나라 기업 전체의 상속세와 증여세를 면제하려던 이 법안을 통과시키긴 국회의원들도 낯이 뜨거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상속 열정의 법제화가 언제까지 미뤄질까? 공적 삶의 가치가 회복되지 않는 한 오래 미뤄지지 않을 것이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706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