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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족에게 '좌빨'이라 할 때 가장 힘들다"

irene777 2015. 1. 1. 00:36



"세월호 유족에게 '좌빨'이라 할 때 가장 힘들다"


<인터뷰> 세월호 봉사자 홍종철씨


- 오마이뉴스  2014년 12월 29일 -




연일 강추위가 매섭게 몰아치지만 세월호 농성장이 있는 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은 여전히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 그리고 봉사자들로 북적인다. 세월호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겐 강추위도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이곳에서 봉사하는 사람 대부분은 20~30대 청년들과 40대 여성들이다. 그곳에서 서명지기를 하는 홍종철씨는 6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나와 궂은 일을 도맡아 한다. 지난 22일 광화문광장에서 홍종철씨를 만났다. 다음은 홍씨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세월호 봉사자 홍종철씨   ⓒ 이영광



- 어느덧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8개월이 지났습니다. 지난 8개월 어떻게 보내셨어요?

"국민들이 죽어도 책임을 안 지고 모두가 빠져 나가려고 했지요. 지난 8개월 동안 현 정권은 무능했어요. 국민이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어요. 국민이 권력을 가져야 국민 행세를 할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한 3개월은 아이들들 생각으로 완전 트라우마 상태였어요. 아직도 머릿속에서 애들이 지워지지 않아요. 살려 달라고 아우성 치는게 느껴져요. 그래서 유가족들과 좀더 같이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사고 소식은 어떻게 들었나요?

"제가 인테리어업을 해서 일찍 출근해요. 일꾼들을 일 시키고 10시쯤 아침 먹으러 갔는데 식당 TV에서 나오더라고요. 그러나 '전원구조'라고 나오길래 애들 살아서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일 끝내고 집에 들어와 보니까 아내가 "애들 다 죽었데"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인터넷을 뒤지니 애들이 많이 못 나왔더라고요. 그거 보니 마음이 침울했어요." 


- 광화문에서 서명 받고 계시는데 어떻게 해서 나오시게 되셨어요?

"안산와룡체육관에 임시분향소가 있었잖아요. 분향을 갔는데 영정 사진이 분향하는 곳과 거리가 있어서 잘 모르겠더라고요. 지금 화량 분향소로 옮겼을 때 다시 갔는데 그때는 영정사진이 바로 앞에 있더라고요. 애들을 보니 마음 속이 막히더라고요. 그래도 그때는 애들에게 무얼 해줄까만 생각했고 광화문에 나올 생각은 못했어요. 


나중에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광화문에서 단식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우연히 여길 왔어요. 어머님들이 서명대에서 일하시고 계시더라고요. 다음날 또 나왔는데 어머님들 몇분이 계셨는데 남자가 짐 같은 걸 날라줘야 하더라고요. 서명대에서 몸으로 도와드리자는 생각으로 계속 일했어요. 그래서 계속 서명대에 있게 된 거예요."


- 봉사자는 20~40대가 대부분이고 선생님 같은 연령대 분들이 많지 않아서 힘든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

"봉사자는 20~40대가 대부분이고 특히 40대는 거의 가정이 있는 어머님들이에요. 그런데 저처럼 나이 먹은 노인들이 천막을 지나가면서 어머님들에게 육두문자를 쓰더라고요. '자식 잃고 마음 아파하는 부모들을 위해 자원봉사하시는 사람들에게 저사람들이 왜 욕을 할까? 내가 저 분들을 조금이라도 막아봐야겠다'고 생각해 어머님들 옆에서 누가 시비를 건다거나 하면 제가 몸으로 막았어요."


- 보수단체와 충돌도 있을 것 같은데.

"어버이연합은 소문에 의하면 담뱃값 벌기 위해 나온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일베는 식사하라고 유가족들이 테이블도 마련했어요. 저도 보면서 '저런 사람이 과연 성인이 되고 자식을 낳으면 어떻게 키울까? 부모 마음도 이해 못하는 놈들이 어떻게 저런 짓을 할까? 자기들이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잃어봐야 세월호 유가족분들의 마음을 그때 가서 알 거 같다'라고 생각 했어요.  그들이 왔을 때 저는 기분이 나빠 두들겨 패고 싶었어요. 그러나 유가족분들도 '차라리 우리가 맞지 치지는 말라'고 하셨고 그래서 속에서 화가 끓는 걸 참았어요."


- 힘드셨겠어요?

"힘들다는 내색은 안했어요. 왜냐하면 서명대 어머님들이 더 힘들어 하시니까요. 웃어가며 어머님들 기운 내시라고 하다 보니 그게 몸에 배더라고요. 지금은 보수단체 누가 와서 시비나 욕을 해도 어느 정도 커버할 능력이 생겼어요."


- 원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요?

"저는 노동자죠. 2008년 광우병 촛불이 있었잖아요. 그때 청와대 입구에 여대생이 넘어져 있었는데 전경들이 군홧발로 여대생 머리를 찼어요. 그 학생이 피할 데가 없어서 차 밑으로 들어가는 걸 아프리카TV로 보고 '저건 아니다. 왜 대학생들을 경찰이 두들겨 패는가. 나가자'고 생각해서 광화문에 나왔어요. 광화문에서 여러 사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 아버님 연령대는 거의 보수층이 많은데요.

"제가 어버이연합 나이대예요. 저는 50대 때만 해도 보수색이 짙었는데 정부가 하는 걸 보다 보니 진보 쪽으로 돌아서더라고요. 정부가 잘못하는 건 잘못한다고 해야만 진짜 보수인데, 지금 하는 것 보면 보수와 진보가 뒤바뀐 것 같아요. 자기들 이익이 안 되면 안하려고 하는 게 보수단체예요. 진보는 자기들 이익은 안 바라고 국민 이익을 바래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진보 쪽으로 가게 되더라고요."


- 어떤 때 가장 마음이 아프세요?

"서명대에 있다 보면 지나가며 '그만하라, 교통사고다'라고 해요. 왜 배사고가 교통사고인가요? 자기 자식 잃어도 그렇게 말할까요? 정부는 한 게 없어요. 유리창에서 구해 달라고 발버둥치던 애들 해경이 구조 안했잖아요. 그런데도 지나가며 유가족들 욕하고 유가족을 '좌빨'이래요. 그 말을 들을 때 제일 힘들어요." 


- 그럼 어떻게 해요?

"웬만하면 좋은 말로 타일러서 보내요. 그리고 저희가 설득 시키려고 커피 한 잔 드리면서 전후 사정 얘기해 드리면 생각을 잘못했다면서 세월호 리본을 달라고 하세요." 


- 광화문에 있으면 지인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많이 만났죠. 이해해 주는 분들은 어머님들하고 식사하라고 돈을 주기도 하고 서명하고 배지도 가져다 달기도 해요. 또 다른 분들은 '니 나이에 그거 할 거냐?'고 이상하게 말하기도 해요. 저희 나이대인데도 '잘한다. 나도 하고 싶은데 의식주가 문제라 못한다'고 많이 호응하시기도 해요." 


- 여기 계시면 생계는 어떻게 하나요?

"제가 현장마다 조카들이 책임지게 해놓아서 저는 새벽 5시반부터 움직여요. 현장 가서 작업하는 것 보고 조카들에게 지시하고 아침 먹고 여기오면 오후 한 시예요. 그리고 중요하거나 돈들어가는 건 집에 가서 팩스로 받아 다음날 현장가서 처리하고 있어요."


- 힘드시지 않나요? 

"나 혼자 힘든 건 괜찮아요. 그러나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더 힘들죠. 그렇게 생각하면 전 힘들지 않아요."


- 가족들 반응은 어떤가요?

"저희집이 네 식구인데 제 딸은 교사인데 전교조 소속이고 아들은 경찰대 나와서 무궁화 하나 달고 근무해요. 가족들이 많이 도와줘요. 그러니까 제가 마음 놓고 여기 나오는 거예요."


- 언제까지 나오실 거예요?

"확실히 말 못하죠. 유가족들이 원하는 대로 수사가 진행돼 책임자들이 다 처벌 받고 유가족들이 광화문을 편안하게 철수하면 저도 그때 철수할 겁니다. 그 전에는 계속 나옵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시면 해주세요.

"여름과 가을엔 많이 와 주셨어요. 그러나 날이 춥다 보니 시민들의 왕래가 드물어요. 하지만 우리가 말로만 '잊지 않겠다'고 하지 말고 춥지만 광화문 자주 오셔서 유가족과 같이 하세요. 힘들어도 행동을 보여주자는 거죠. 그게 유가족들에게 힘이 됩니다."



- 오마이뉴스  이영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