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회-생각해보기

<곽병찬 편지> 차라리 허수아비가 대통령이었다면...

irene777 2014. 12. 30. 19:30



차라리 허수아비가 대통령이었다면...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88


- 한겨레신문  2014년 12월 29일 -




▲ 곽병찬 대기자



대통령 대선 공약은 실종되고 유신의 악몽이 가득

사슴이 말이 되고, 흑이 백이 되고, 퇴행이 개혁으로...




▲ 26일 저녁 8시께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빌딩에서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이라는 명의로 박근혜 대통령을 규탄하는 삐라 1만장이 살포됐다. 삐라에는

 ‘진짜 종북은 누구인가?’ 라는 제목으로 2002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방북기와 

방북 인터뷰 내용 등이 담겨져 있다.   서울=뉴시스



집권 첫해 교수들이 1위로 뽑은 사자성어는 도행역시(倒行逆施)였습니다.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는 것에 대한 우려와 경고가 담긴 것이었습니다. 기대와 달리 경제민주화, 차별과 격차 철폐, 공정성 회복, 복지사회 등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실종되고, 사찰과 정치공작 등 유신의 악몽이 가득한 억압적 통치가 부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교수들이 1위로 꼽은 사자성어는 지록위마(指鹿爲馬)였습니다. 거짓된 말과 행동으로 윗사람을 농락한다는 것입니다만, 고사 속의 뜻은 더 험악합니다. 윗사람에 대한 농락은 그렇다 해도, 아랫사람들에게는 거짓을 진실로 믿도록 겁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기를 넘어 일종의 공갈과 협박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건 일말의 기대가 섞인 우려와 경고가 아니라, 정권에 대한 절망이고 포기입니다.


물론 선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위아래를 농락하고 겁박한 조고는 누구이고, 농락당한 호해는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고사 속의 어리석은 황제 호해일까요 아니면 음흉한 조고일까요. 대통령이 호해라고 할 경우 조고는 이른바 그림자 권력들일 겁니다. 황제를 농락하고 신하들을 겁박하는 ‘상시’들이겠지요. 대통령이 조고라면, 호해는 이 나라 국민이 될 겁니다. 사실 최종적으로 속임과 조롱과 멸시를 당한 건 주권자인 국민입니다.


홍대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해 ‘진짜 종북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삐라가 1만여장 뿌려졌고, 경찰에 초비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규탄의 강도를 따진다면 삐라의 내용은 지록위마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대통령을 바보로 조롱하거나, 아니면 대국민 공갈사기범으로 단죄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2월 1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정윤회씨 국정개입’ 

문건 파문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오늘 이 정부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이란 걸 노사정위에 보고했습니다. 노사정위에서 논의할 ‘정부안’이라고 둘러대긴 하지만, 사실상 정부가 발표할 확정안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미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평가한 대로 비정규직 양산 대책에 불과합니다. 비정규직에게 담뱃값 정도의 혜택이 돌아가게 하긴 했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 해소와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그 대신 기간제의 계약기간을 대폭 늘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현재 전체 노동자의 45%에 이르는 비정규직을 팽창시키는 조처입니다. 게다가 파견업종도 대폭 확대하는 방안을 담았습니다. 기업이 직접고용을 피할 수 있도록 자본가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장그래’들이 원하는 것은 고용 안정이고, 격차와 차별 해소입니다. 정부 대책은 이 모든 걸 외면하고 있고, 오히려 모순을 심화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그걸 두고 비정규직 보호 혹은 장그래 보호 대책이라고 하고 있으니, 지록위마의 전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 해의 마지막날까지 국민을 속여먹는 게 그렇게도 재미있습니까?


지난 한 해 나라 안팎에서 수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올해의 사진 100장에는 ‘세월호 참사’ 관련 사진이 2장 포함됐습니다. <에이피>(AP) 통신 역시 올해의 사진 150장을 선정하면서 세월호 참사 관련 사진을 4장 포함시켰습니다. 지구촌에서 대한민국의 2014년은 세월호 참사로만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 이 정부가 수수방관하는 가운데 304명의 승객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전국민이 지켜봐야 했던 사건 말입니다.


문제의 7시간 동안 당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아직도 국민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이고, 주무시면 퇴근”이라는 말로 모든 의문을 묵살해버렸습니다. 국민을 이렇게 겁박하고, 대통령을 그렇게 조롱해도 됩니까? 나에게 그 말은 ‘눈만 뜨고 있으면 되는 대통령’이란 말로 들렸습니다. 참사의 결정적인 시간에 아무런 한 일이 없는 대통령을 두고 그것도 대통령의 집무라고 한다면, 차라리 일 년 내내 두 눈 부릅뜨고 있는 허수아비를 청와대에 앉혀두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정체가 좀더 분명해지기 시작한 건 민정수석실 감찰 문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입니다. 문건 내용만 보면 당신은 그림자였습니다. 국정을 주무르는 자는 따로 있었습니다. 호해 뒤에 조고가 있듯이, 당신 뒤에는 문고리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건 폭로 사건을 문건 유출 및 비밀 누설 사건으로 규정했습니다. 그 가이드라인을 받들어 ‘문서 유출, 국기 문란’ 구호를 외치고 다닌 건 당신입니다. 검찰은 그에 따라 국정 농단 행위에는 눈감은 채 유출자 색출에만 전념했습니다.


당신은 문건 폭로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허당인지, 얼마나 쉽게 조정할 수 있는지 웅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물론 비서실장도 국정을 농단한 자들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누군가 써준 것만을 읽었습니다.


지난해의 사자성어 후보 중에서는 이가난진(以假亂眞)이 3위에 올랐습니다. 가짜가 진짜를 어지럽히고 거짓이 진실을 뒤흔든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현실은 지록위마에 이가난진을 더할 때 제대로 반영될 듯합니다. 그림자가 실체를 흔들고, 거짓이 진실을 흔들고, 허깨비가 실물을 흔들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국민을 속이고, 그런 대통령을 상시들이 속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슴이 말이 되고, 흑이 백이 되고, 퇴행이 개혁이 되고, 반민주가 민주가 되었습니다.


이런 ‘대국민 조롱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당신은 말했습니다. “정부는 항상 국민을 믿고 국민의 편에서 개혁을 추진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자세에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지록위마(조롱)가 어디 있고, 이가난진(거짓)이 어디 있겠습니까.



- 한겨레신문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