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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편지> 을미년의 사변을 기억하며...

irene777 2015. 1. 6. 07:14



을미년의 사변을 기억하며...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89


- 한겨레신문  2015년 1월 5일 -




▲ 곽병찬 대기자



  콘트롤타워 부재, 분열 사회, 침몰 직전 국민경제...

오늘의 현실은 구한말 패망 직전 조선을 보는 듯




▲ 박근혜 대통령이 3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5년 신년인사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양띠 해를맞아 올해 각계 신년사의 열쇠말은 평화와 화목이었습니다. 그 연장에서 대통령도 신년사에서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을 상기하며, 남북간 평화와 통일의 기반 확충을 올해의 가장 과제로 꼽았습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기원합니다만 마찬가지로 갈등의 수렁에 빠진 계층, 세대 등 우리 사회의 화목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을미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건 불행하게도 을미사변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당한 사건 말입니다. 120년 전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시를 받은 한떼의 칼잡이들은 궁궐 내방 깊숙이 난입해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난자했습니다. 명성황후가 한때 청국에 의탁하고, 청일전쟁 이후엔 러시아에 의탁해 조선반도를 집어삼키려던 일제를 견제하려 했으니 눈엣가시였을 겁니다. 그러나 일개 공사가 주재국의 황후를 멋대로 시해할 정도로 당시 조선은 일제의 눈에 국가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을미사변은 조선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왕실과 기득권세력이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한 해 전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걸고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조선 왕실은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의 대상이었던 일제의 힘을 빌려 농민군을 압살했습니다. 이후 일제는 청일전쟁을 도발해 이 땅을 전장으로 만들었고, 청을 패퇴시킨 뒤에는 조선을 아예 집어삼키려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수중에 넝쿨째 굴러들어간 호박이었습니다.


을미사변이 1895년 10월에 발생했으니, 우주의 운행이 새로 시작한다는 육십갑자가 두 번이나 지나갔습니다. 그런 역사적 시점에서 정부는 을미년을 코앞에 두고 지난해 말 야바위꾼처럼 국민을 속이고 일본과 군사정보공유 약정을 맺었습니다. 대통령도 염치가 없었나 봅니다. 적으나면 한 마디쯤 을미사변과 명성황후에 대해 한 마디 말을 할 만도 한데, 대통령은 신년사건 신년인사회건 어떤 자리에서도 일언반구 하지 않았습니다.




▲ 잊을 수 없는 4월 16일. 304명의 고귀한 생명이 사라졌다. 단원고 학생들이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2014년은 저물고 있지만 부모들은 아직 이들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때론 학교를 찾아와 책상을 쓰다듬으며 의자에 앉아 자식들의 

체온을 느낀다. 마저 하지 못한 말을 쪽지와 노트에 담아 하늘로 보낸다. 

연말을 맞아 2학년 복도와 교실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달린 트리가 세워졌다. 

책상에는 각자의 사연들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 김명진 기자



사실 오늘의 현실은 을미사변의 비극을 전후로 한 조선의 상황과 중첩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거울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는다’는 옛말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2년은 넘어야 할 산이 더 험악해지고, 물길은 더 거칠어졌으며, 그나마 있던 징검다리마저 쓸려나가게 했습니다. 오죽하면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이런 현실을 임중도원(任重道遠·등에 진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그런 인식은 여러 매체의 신년 여론조사에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경향신문> 조사에선 박근혜 정부 2년 동안 더 불행해졌다는 사람(34.6%)이 더 행복해졌다(11.1%)는 사람보다 세 배가 많았습니다. 지난 대선 때 내걸었던 국민행복시대의 간판은 이제 철거된지 오래입니다.


앞으로 전망을 묻는 <한겨레>의 조사 결과는 더 끔찍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계 전문가 10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85.3%가 우리 사회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특히 매우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가 45.1%나 되었습니다. 민주주의 후퇴, 경제적 양극화 심화, 깊어지는 계층 세대간 갈등과 사회적 불공정성 등이 그 원인으로 지적됐습니다. 1997년 구제금융사태 때처럼 국민파산시대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어깨를 누루고 있는 것입니다.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이 31일 낸 발표를 보면, 새해 전망 경제가 나아질 것이라는 응답자는 15%에 불과했고, 어려워질 것이라는 사람은 37%에 이르렀습니다. 재계의 앓는 소리만 대변해온 전경련이 내놓은 올해 전망은 예전의 그런 상투형 엄살과는 급이 다릅니다. 허창수 회장은 신년사에서 “우리 경제가 구조적 장기침체에 빠질까 우려된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경제전문매체 블룸버그는 올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가장 위험한 사건 15건 가운데 북한의 도발과 남동중국해 충돌을 포함시켰습니다. 우리의 명운과 직결되는 일들입니다.


그런 사정 때문인지 김호기 연세대 교수와 송호근 서울대 교수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구동성으로 올해 한국 사회를 “구한말 패망 직전”에 비유했다고 합니다. “컨트롤타워 부재가 만연하면서 사회 곳곳이 분열과 갈등에 허우적대고, 무정란 행보가 계속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은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진영의 대표적 논객으로 꼽힙니다.




▲ 비선 실세 의혹을 받는 정윤회씨가 지난 12월11일 새벽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찰 조사를 

   받은 뒤 건물 밖으로 나오고 있다. 그의 차량을 쫓는 취재 차량의 접근을 검찰에서 제공한

차량이 가로막는 등 새벽의 추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 한겨레 김봉규 기자



갑오농민혁명과 을미사변은 구한말 패망직전에 있었던 최후의 몸부림이자 패망의 직접적 징후였습니다. 갑오농민혁명이 제기한 의제를 우리 사회가 슬기롭게 수렴했다면, 조선은 환골탈퇴와 함께 새로운 출발과 도약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왕실은 외세를 끌어들여 제 나라 국민을 무참히 살륙했습니다. 을미사변 등 패망으로 가는 롤러코스트에 스스로 올라탄 것입니다.


이 정부에게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그것이었습니다. 이 미증유의 사건 속에는 이 정부는 물론 이 나라에 쌓여있던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적폐를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부는 적폐를 도려내는 게 아니라, 국민을 속이고 분열시키고 호도하는 방법으로 참사를 덮는데 급급했습니다. 어떻게 덮어지는가 하던 시점에서 터진 게 지난해 민정수석실 감찰문건 파문입니다. 문건의 내용은 최고 결정권자를 우롱하는 상시들의 발호와 무너진 국가의 콘트롤타워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심화되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침몰 직전의 국민경제와 함께 그것은 구한말 패망전야를 예고하는 암울한 경고등이었습니다.


교수들이 올해의 바람을 담은 사자성어는 정본청원(正本淸源)입니다. 근본을 바로 세우고 원천을 깨끗이 하라는 뜻입니다. 새누리당 김 대표도 “올 한 해 근본을 바로 하고 근원을 맑게 하는 정본청원의 개혁 정신으로 나아가자”며 이 말을 인용했습니다. 근본이 얼마나 뒤틀리고, 원천이 오염됐으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요.


하지만 백날 그런 바람을 전하고, 다짐을 해도 당신은 회심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검찰은 오늘 대통령 측근들의 국정농단 의혹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문건 내용이 보도됐을 때, 곤경에 처한 상시들이 처음 그리고, 대통령을 통해 검찰에 전해진 가이드라인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문건 생산자들의 농간으로 매도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거꾸로만 가는지, 도행역시와 지록위마의 우롱과 퇴행은 계속되는 것인지...


국민이 꿈꾸는 양떼의 화목과 평화는 백일몽이 될 것 같습니다. 오히려 무슨 사변이건 나고야 말 것같습니다.



- 한겨레신문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