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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선옥 - ‘국가’를 기다리며

irene777 2015. 2. 28. 16:28



‘국가’를 기다리며


- 시사IN  2015년 2월 26일 -




▲ 이선옥  르포 작가



국가의 부담을 덜어주려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는 국민은 멀리에만 있지 않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간절한 기다림을 보며 국가를 생각한다. 

아직 오지 않은 진정한 국가를 기다린다.



IS에 인질로 잡힌 일본인 두 명이 끝내 참수당했다. 그들의 부모는 “국가와 국민에게 폐를 끼쳐 죄송하다”라고 고개를 숙인다. 일본인 특유의 성숙한 국민성이라 감탄하는 사람도 있고, 바로 그 국민성이 끔찍하다는 반응도 있다. 부정이든 긍정이든 이 비극적 상황에서 예상하기 어려운 발언이라는 반응은 같다. 이런 이례적인 상황이 과연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일까?


지난해 11월 세월호 참사 200일이 되던 때 실종자 가족들은 수중 수색 중단을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자신들의 존재가 타인에게 고통이 되는 현실 때문이었다. “너무나 힘들었지만 이 결정으로 정부의 고뇌와 잠수사 분들의 말 못할 고통, 공무원 분들과 자원봉사자들의 고생, 피해 지역으로 힘들어하는 진도 군민들의 아픔도 눈 녹듯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라고 말하며 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국가에 책임을 묻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의 부담을 덜어주려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는 국민의 모습은 멀리 있지 않다.




▲ ⓒ난나



국가는 합리성과 상징성이라는 작동 방식이 있다. 평상시 국가 체제는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때로는 상징성을 작동 기제로 활용한다. 대개 상징성을 가동한 행위는 비용 면에서 비효율적이지만 추산하기 어려운 효과를 얻어낸다. 실제 사례를 모티브로 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생존 가능성도 불분명한 일개 병사 라이언을 구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들이는 유·무형의 비용이 엄청나다. 타 국가의 영토에 있는 자국민의 유해를 송환하기 위해 외교력과 국방력을 총동원하거나,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곤경에 처한 자국민을 구하는 현실의 행위들도 같은 맥락이다.


단 한 구뿐인 자국민의 유해를 송환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부의 모습은 국민에게 신뢰와 감동을 준다. 두려움은 복종을 낳지만 신뢰는 자발적 충성을 낳는다. 두려움에서 나온 복종은 허약하나 신뢰에서 나온 충성은 단단하다. 국민이 국가를 신뢰할 때 지배 권력은 투입 대비 가장 큰 통치 효과를 얻는다. 불합리해 보이는 행위 뒤에는 고도의 ‘합리적’ 계산이 숨어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대통령은 “마지막 한 명의 실종자까지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겠다”라고 약속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국민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 상징적 선언이 바로 불합리한 선택을 하는 국가가 존속할 수 있는 이유이자 진정한 국가의 모습이다.



희생된 목숨을 끝까지 책임지는 일을 비용으로 환산할 수 있는가


피해자 가족들은 지금 세월호의 인양을 촉구하며 도보 행진을 하고 있다. 수색의 최후 수단으로 인양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벌써 정부 일각에서 ‘인양에 투입하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으로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오기 시작한다. 비용문제가 제기될수록 실종자 가족들만 고통스러울 테니 인양을 고집하지 않는 게 좋다는 나름 우호적인 충고도 있다. 질문부터 잘못됐다. 이 물음은 ‘국가의 무책임과 무능으로 희생된 목숨을 끝까지 책임지는 일이 비용으로 환산될 수 있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국가의 부담을 덜어주는 결정을 내리고도 우호적인 이들에게마저 세금 쓰는 천덕꾸러기가 된 피해자 가족들을 대신해 국가가 답할 일이다.


절망적인 사건이 많을수록 억지로라도 희망을 호출하는 일이 잦아진다. 희망버스가 그렇고, 희망식당이, 희망법이, 희망지킴이가 그렇다. 그러나 절망 그 자체인 세월호 참사는 희망이란 말을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기다림이란 말이 희망의 자리를 대신한다. 구조를 기다리다 죽어간 아이들, 아이들의 구조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부모들, 정부의 구조를 한마음으로 기다린 국민들, 그리고 여전히 뼛조각 하나라도 찾고 싶어 인양을 기다리는 실종자 가족들, 국민의 지지를 기다리는 유가족들. 사건 곳곳에 간절한 기다림만 있다. 팽목항을 향해 가는 버스의 이름도 ‘기다림의 버스’다. 무엇보다 가장 간절한 기다림은 바로 국가다.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진정한 국가를 기다린다.



<출처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