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회-생각해보기

바다에 묻은 아이들이 40년 전에도 있었단다

irene777 2015. 2. 28. 15:35



바다에 묻은 아이들이 40년 전에도 있었단다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김형민  SBS CNBC 프로듀서


- 시사IN  2015년 2월 25일 -




1974년 해군 신병 159명이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YTL정의 비극’은 평시에 군함에서 일어난 최대 해난 사고로 <기네스북>까지 올랐다. 

그로부터 40년 뒤, 우리는 다시 한번 바다에 가라앉는 배를 눈뜨고 지켜봐야 했다.



세월호 참사 후 아빠랑 안산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 갔던 기억 나지? 선뜻 따라나서 줘서 고맙다는 말을 이제야 전한다. 드넓은 운동장을 휘감고 돌았던 사람들의 줄 기억 나지? 사실 아빠도 막막했단다. 네가 다리 아프다고 불평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됐고. “여기 사람들 다 다리 아프게 기다리잖아” 하는 네 한마디에 맘을 놓았던 기억이 난다.


몇 시간을 기다려 겨우 영정들 앞에 섰을 때 아빠는 무안할 만큼 펑펑 눈물을 흘렸지. 커다란 체육관을 뒤덮은 하얀 국화의 홍수, 그 속에 빛나던 학생들의 준수한 얼굴들, 그들에게 전하는 눈물 젖은 메시지 등 국상이 난 듯 경건하던 그날의 풍경들. 


그런데 그런 추모의 공간마저 제대로 허용되지 않았고, 오랫동안 그저 지워야 할 과거로, 묻어버려야 할 기억으로 치부돼온 슬픈 죽음들도 있었단다. 1974년 2월22일 발생한 해군 YTL 침몰 사건의 희생자들이 그들이지.


그 전날, 입대 후 7주 동안의 지상 훈련을 마친 해군 159기 신병들은 무척이나 들떠 있었어. 마치 ‘땅개’(농담 삼아 육군을 이리 부르기도 해)같이 흙냄새만 실컷 맡다가 드디어 배에 올라 항해를 하게 됐으니 말이야. 물론 해군 본부가 있던 진해에서 충무(오늘날에는 통영이라고 불리지)로 가서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렬사 사당에 참배하고 오는, ‘항해’라고 하기엔 뭐한 일정이었지만 말이야.




▲ ⓒ연합뉴스



근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영외에 나온 신병들은 들떠 있었고 그들은 꼭두새벽에 충무 시내에 상륙해서 해군가를 우렁차게 불렀다고 해.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가 고향/ 가슴속 끓는 피를 고이 바치자.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방패/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 바다를 지켜야만 강토가 있고/ 강토가 있는 곳에 조국이 있다….” 초보 해군에게 바다 냄새는 얼마나 설레었겠니. 폭풍주의보 내린 바다의 배멀미조차 반가웠을지도 모르지.


그들이 진해에서 타고 온 큰 배는 부두에 접안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상륙했던 대로 예인정, 즉 120t 정도의 YTL정을 타고 모함으로 돌아가야 했지. 배의 손님은 무척 많았어. 해군 159기 신병과 해양경찰 위탁교육생, 그리고 인솔 부대원들까지 63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두에 복닥거렸고 그중 316명이 일단 1진으로 승선했지. 그런데 여기서 잠깐. YTL은 수송선이 아닌 예인선이었고 150명 정도 타면 꽉 차는 작은 배였는데 바다에는 앞서 말한 대로 폭풍주의보가 내려져 있었어. 살기 넘치는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로, 배가 기울 정도로 많은 ‘가슴속 끓는 젊은 피’들을 싣고서 YTL은 나아간 거야. 마치 짐을 싣느라 평형수를 빼버린 세월호가 다른 배들은 엄두도 못 내는 안갯속 바다로 단원고등학교 아이들을 태우고 출항했듯 말이야.


모함인 ‘북한함’(오른쪽 사진)에 거의 닿았을 무렵 갑자기 큰 파도가 YTL을 덮쳤고 그걸 피하려고 급선회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YTL은 균형을 잃고 말아. 그리고 배 안에 있던 수백명과 함께 물 속으로 곤두박질쳐 들어갔지. 그후 펼쳐진 풍경은 흡사 세월호 사건의 복사판이었어. 북한함이 기적만 울릴 뿐 속수무책으로 발만 동동 구르는 가운데 인근의 어부들이 필사적으로 달려와 물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 올렸던 거야. 그 긴박한 구조 과정을 담은 기사들을 읽다 보면 맨가슴에 얼음물을 끼얹는 느낌이야.




▲ 지난해 4월29일 안산 화랑유원지에 위치한 세월호 합동분향소. 

사람들의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시사IN 신선영



구명보트의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수많은 병사들이 허우적거리는 걸 본 어부들은 처음엔 나무 발판을 던졌고 다급해지자 배 문짝까지 뜯어 던졌어. 물에 뜨는 거라면 뭐든 던져주고 싶은 마음이었지. 이미 정신을 잃고 물에 떠다니는 사람들은 갈고리로 옷을 걸어 끌어올렸고 로프를 있는 대로 바다에 뿌렸어. 어떤 병사는 두 팔로도 모자랐는지 이로 로프를 악문 채 끌어올려졌는데 이가 세 개나 부러지도록 로프를 놓지 않았다고 해.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지만 작은 어선에 옷이 있겠어 이불이 있겠어. 저체온증에 걸려 눈에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한 병사들을 향해 어부 한 명이 악을 썼어. “군가 불러. 가만히 있으면 죽어! 움직이면서 군가 불러!” 바로 몇 시간 전 의기양양하게 충무 시내를 행진하며 부르던 군가를 병사들은 살기 위해 부르게 돼.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가 고향. 가슴속 끓는 피를….” 그 가냘픈 군가 소리 속에서 그들의 전우들은 얼어 죽고 빠져 죽어가고 있었어. 잠깐 사이에 159명의 목숨이 바다 속으로 사라졌지. 작년 4월16일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 300여 명의 언니 오빠들이 그랬듯이.


세월호 참사와 너무도 닮은 풍경에 눈앞이 캄캄해지지만 그러나 정작 슬픈 건 사고 이후 벌어진 일들이야. 어부들이 필사적으로 문짝을 뜯어 던져주고 병사들을 건져내고 노래를 부르게 하던 수십 분 동안 북한함은 배에 보유하고 있던 구명보트 두 척을 제때에 내리지 못했어. 소문에 따르면 장교들이 육지에 나가서 늘어지게 식사를 하고 있었고 한 척은 고장나 있었다고 하는데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그 이유를 추궁하지만 끝내 밝혀지지 않았어. 해군 참모총장은 이렇게 대답했지. “50분 동안 경적을 울리는 등 각종 구조 요청을 다했으며 구명보트는 고장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구명보트를 제때 내리지 못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어. 뱃사람들은 “어떻게 이 작은 배에 300명이 탔단 말인가” 고개를 저었지만 신병교육단이 요청한 ‘선박 2척 이상 지원’을 누가 무엇 때문에 거부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어. 장교 3명이 구속되지만 그들도 그 해가 가기 전에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다른 인솔 장교들도 원대복귀해서 군 생활을 계속하게 돼. 사람이 159명이나 죽었는데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거야.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대답하던 국방장관이 대책이랍시고 남긴 한마디는 성미 급한 우리 딸을 파르르 떨게 만들기에 충분해. “해군 신병 교육 과정에 수영 교육을 반영시켜 해군들이 수영을 익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사고는 어디에서나 날 수 있어. 세계 어느 바다에서든 여객선이건 군함이건 어이없이 침몰하고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어. 하지만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사고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시험에 틀린 문제를 되짚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가 우등생과 열등생을 가르듯이 말이야. 전쟁 시기가 아닌 평시에 군함에서 일어난 최대의 해난 사고로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YTL정의 비극은 민망하고 낯 뜨거운 침묵 속에 잊혀갔어. 한국 해군이 공식적인 위령제를 올린 건 사고 후 24년이 지난 1998년의 일이었단다. 그동안 YTL은 언급조차 껄끄러운 일종의 금기였어. 그리고 그로부터 꼭 40년 뒤 우리는 바다에 서서히 가라앉는 세월호를 눈뜨고 지켜봐야 했지.


어쩌면 세월호는 YTL정 사건을 억지로 잊으려 들었던 죄의 대가인지도 몰라. 세월호 조사 특별위원회가 제대로 된 출발도 하기 전에 시비가 걸리고 파견 공무원들이 썰물 빠지듯 철수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빠는 또 한번 네게 미안해졌다. 세월호가 YTL정 사건처럼 유야무야되고 정확한 진상 파악 없이 또 한 번 어둠 같은 침묵에 묻힌다면 우리는 그 무책임의 대가를 무엇으로 치르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출처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