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비감한 8월 보내며
진실의길 정운현 칼럼
- 2015년 8월 27일 -
방랑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은 양반집안 출신으로 일생을 떠돌이 시인으로 살다가 객사했다. 그의 묘는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있는데 이곳이 그의 고향은 아니다. 과거에 장원급제해 탄탄대로가 보장됐음에도 그가 한사코 벼슬자리를 버리고 일생을 아웃사이더로 살다간 데는 슬픈 가족사가 있다.
무신 출신인 그의 조부 김익순은 평안도 선천(宣川) 부사(현 시장)로 재임 중 ‘홍경래의 난’을 만났다. 반군 진압 책임자인 김익순은 반군과의 교전에서 패하자 반군에게 항복하였다. 게다가 이 죄를 모면하려고 모종의 사건을 꾸몄다가 들통이 나 김익순은 결국 모반대역죄로 참수당하였다. 이 일로 김삿갓 집안은 멸문지화를 입었다.
그의 모친은 폐족의 후손이라는 멸시를 견디다 못해 두 형제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로 숨어들었다. 이곳에서 학업에 정진한 그는 과거에 응시했는데 시제(試題)가 ‘역적 김익순’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집안내력을 전혀 모른 김삿갓은 김익순이 친조부인 줄도 모르고 김익순을 조롱하는 글로 장원급제를 하였다. 뒤늦게 모친으로부터 집안내력을 듣게 된 그는 하늘 볼 낯이 없다며 큰 삿갓을 쓰고 땅만 보고 다녔다.
▲ 강원도 영월에 있는 김삿갓의 묘. 상석, 비석 모두 자연석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 털어 볼 때 한 시대가 끝나면 역사청산이 늘 뒤따랐다. 새로운 권력자는 구시대 세력을 반역자나 파렴치한으로 몰아 가차없이 청산(淸算)했다. 물리력을 동원한 권력교체, 즉 반정(反正)은 사후에 피비린내를 진동시켰다. ‘계유정난’으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친동생 안평대군을 반역혐의로 몰아 죽였다. 심지어 안평대군의 부인과 딸, 즉 제수와 조카를 양반집 노비로 삼도록 했다.
우리 역사에서 과거사 청산은 이처럼 피도 눈물도 없었다. 조선시대에 역적의 3족을 멸한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진짜 제대로 청산했어야 할 과거사를 흐지부지 넘긴 사례가 하나 있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것이 그것이다. 돌이켜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건만 엄연한 사실이다.
해방 후 우리민족에게 주어진 2대 과제는 반듯한 독립국가 수립과 친일 반민족행위자 처단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둘 다 실패했다. 국토는 남북이 허리가 잘렸고, 친일파는 청산은커녕 다시 우리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게 됐다. 주범은 ‘미군정 3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미군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친일파 청산 요구를 묵살했으며, 오히려 친일경력자를 수족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미군정이 물러간 후 이 땅은 일제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친일파 세상이 돼버렸다. 미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에는 과거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이 대거 입교하였는데 이들은 나중에 창군(創軍)의 주체가 되었다. 경찰, 관료, 사학(교육), 심지어 문화예술계조차 일제에 협력했던 자들의 독차지가 되었다.
제헌국회에서 만든 반민특위는 태생 단계에서부터 절름발이나 마찬가지였다. 활동기간 내내 끊임없이 이승만 정권의 견제와 방해를 받았으며, 그들이 비호한 친일 세력들은 급기야 국가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반신불수로 만들고 말았다. 일제 35년 동안 이루 셀 수도 없이 많았던 다종다양한 친일파들은 이후 대로를 활보하였으며, 더러는 애국자로 둔갑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친일파들이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하기도 하고 독립운동사를 편찬하기도 했다. 일본 육사를 나와 만주군 장교로 해방을 맞은 박정희는 3.1절이나 광복절 때 독립유공자들을 향해 단상에서 훈시를 하거나 그들의 목에 훈장을 걸어주었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친일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였으며, 까딱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극우 일각에서는 요즘도 그런 주장을 펴고 있다.
최근 <뉴스타파>에서 해방70주년을 맞아 기획한 ‘친일과 망각’ 4부작은 우리를 다시 한 번 더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친일파 후예들은 하나같이 부와 기득권을 대물림하여 호사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 기업인, 교수, 변호사, 언론인, 고위관료 등등. 반면 독립유공자의 후예들 가운데 출세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소설가 박완서는 ‘오만과 몽상’에서 “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는 악덕기업인을 낳고, 동학군이 애국투사를 낳고, 애국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라고 썼다. 소설 속에 나온 내용이라고 해서 꾸민 얘기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다. 작금의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한 글도 없지 싶다.
지난달 하순에 개봉한 영화 ‘암살’이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필자는 이를 지켜보면서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 개탄스럽기도 하다. 현실 속에서 실행하지 못한 일을 영화로나마 볼 수 있어서 기쁘고 통쾌한 반면, 지난 역사에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친일파 청산 실패를 얘기할 때면 흔히 프랑스의 나치청산 사례를 자주 거론하곤 한다. 잘 알려진 대로 프랑스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드골의 지휘 하에 나치 협력자들을 깨끗이 청산했다. 이웃 네덜란드,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북구의 노르웨이, 핀란드 등에서는 프랑스보다도 더 가혹할 정도의 청산을 단행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후 이런 문제로 한 번도 국력을 낭비한 적이 없다.
이번 <뉴스타파>의 보도를 보면서 치가 떨리는 것은 그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일제 때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식의 자기변호와 궤변을 들으며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다. 국가를 상대로 친일파 선정 무효소송은 물론이요, 친일파 조상의 땅 찾기를 스스럼없이 해대는 그들이다. 친일파 조상이나 그 후손들 하나같이 일말의 부끄러움도 모르는 파렴치한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찍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일갈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오늘날 일본 아베 정권의 작태를 보면 단재의 일갈이 조금도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비단 일본만이 아니다. 김구, 윤봉길 등의 항일투쟁사를 폄훼하면서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을 미화하려는 수구진영, 이미 폐기처분된 국정교과서 제도 추진으로 근현대사 교육을 축소시키려는 박근혜 정권도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일제 강점 35년의 두 배나 되는 ‘해방 70년’이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별반 없다. 친일파 청산 문제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민족적 화두이며, 그들이 남긴 부정적 유산은 우리사회를 갈등과 소모적인 논쟁으로 국력을 낭비시키고 있다. 올 광복절도 울분과 탄식 속에서 보내야만 하는 현실이 그저 비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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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table=wh_jung&uid=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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