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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대엽 - 국민이 없는 정치

irene777 2016. 3. 3. 02:58



[정동칼럼]


국민이 없는 정치


- 경향신문  2016년 2월 25일 -





▲ 조대엽

고려대 교수 (사회학)



2월25일로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3주년을 맞았다. 청와대가 지난 3년간 박 대통령의 공개발언 1342건을 빅데이터로 분석해 본 모양이다. 대통령이 가장 많이 사용한 용어가 ‘국민’, ‘대한민국’, ‘경제’ 순이라고 한다. 또 청와대는 취임 3주년을 맞아서 대통령의 비유모음집이란 것을 냈다고 한다. “정책을 만드는 대통령의 비유”라는 부제가 달렸다. 박 대통령이 평소에 정책을 설명하면서 비유적 표현을 많이 쓴 데 착안해서 11개 분야, 40개의 세부정책과 관련된 비유적 표현을 묶었다고 한다. 예컨대 융통성 있는 법적용을 강조하며 언급했던, 그래서 이 책의 제목으로도 채택된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나요?”, 경제활성화 법안 처리와 관련해서 언급한 “불어터진 국수, 누가 먹겠어요?” 같은 내용들을 모은 책이다.


청와대는 ‘비유집’의 발간취지를 국민들과 보다 가깝게 소통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라고 했다. 특히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비유나 신조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대중적인 언어로 정책의 본질을 쉽게 전달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전달하는 ‘진심’의 결과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청와대의 이런 설명이나 빅데이터 분석 결과를 보면 박 대통령의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마치 세종 임금의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는 수준이다. 그런데 나에게 박근혜 정부 3년의 기억은 차가운 정부, 싸늘한 대통령이라는 것 외에 잘 떠오르는 것이 없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듯하다. 새누리당의 전신이었던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목사도 방송인터뷰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제가 대통령들을 많이 겪어봤지만 박근혜 정부만큼 찬바람이 쌩쌩 나는 한겨울 같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라고 했다.


유난히 찬바람이 쌩쌩 나는 3년이었다. 세월호 사태를 겪으며 희생자에 대한 대통령의 태도는 차가웠다. 이른바 ‘유체이탈식’ 화법으로 말하는 대통령은 이 땅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존재가 아니었다. 메르스 사태의 초기에도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하고, 배신의 정치를 거론하며 여당의 원내총무를 사퇴시키는 대통령, 쟁점 법안처리의 지연에 대해 국회를 호통치는 대통령, 진실한 사람만 선택받게 해달라고 선거법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말하는 대통령,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인 대통령의 무모함은 서슬 퍼런 무법의 권력자였다. 차가운 권력의 무소불위는 국내에 머물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협상을 졸속으로 타결해버리는 것도, 개성공단을 폐쇄해버리고 남북 간 전쟁위기의 빌미를 준 것도 대통령의 차가운 무모함이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로 순식간에 진행했던 미국과의 사드 협의도 국민들에게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한·미 간에 사드 배치 문제가 결론 난 것 같았는데 다시 중국과 미국 간에 비핵화와 평화협정, 사드 비배치 문제가 동시에 진전되는 듯한 복잡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정부의 무모함만 노출된 것도 차가운 대통령이 보여준 과격한 정치였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이 같은 정치행태에는 대의정치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임의 윤리’가 없다. 대의민주주의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운영하는 제도다. 그래서 대통령과 집권여당은 국민들을 책임져야 한다. 책임을 모르는 정치는 국민 없는 정치나 마찬가지다. 세월호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대통령의 국민이고, 메르스로 불안에 빠진 국민이 대통령의 국민이다. 개성공단의 입주업체와 그 하청업체의 사람들이 대통령의 국민이고, 평생을 가슴 속에 피멍을 안고 살아온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대통령의 국민이다. 그리고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배치로 북한의 위협에 더해 중국과의 새로운 긴장 속에서 전쟁의 공포에 떨어야 하는 이 땅의 사람들이 바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대통령의 국민이다. 대통령의 국민인 이 사람들 말고 누구를 위해 대통령은 존재하는가?


지난 3년간 대한민국은 국민이 없는 나라였다. 대통령이 책임지는 국민이 없는 나라였고, 대통령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국민도 없는 나라였다. 대한민국은 오직 대통령만 있는 이상한 나라였다. 옛 어른들은 혹독한 시집살이하는 며느리의 삶을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이라고 했다. 남보다 못한, 사랑 없는 시어머니 밑에서 국민들은 혹독한 시집살이 3년 한 기분이다. 총선을 앞두고 남북의 긴장을 몰아가는 것을 보면 국민들의 시집살이가 길어야 5년이라는 체념이 오히려 순진한 게 아닌가라는 불길한 생각도 든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2252050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