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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권석천 - 그렇게 민주주의가 된다

irene777 2016. 3. 3. 03:31



[권석천의 시시각각]


그렇게 민주주의가 된다


- 중앙일보  2016년 3월 1일 -





▲ 권석천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 일요일 오후 4시. 국회의사당역 출구를 막 나왔을 때였다. 눈발이 내리는 국회 정문 앞에 ‘시민 필리버스터’ 앰프가 울리고 있었다.


“대통령선거 불법 개입, 간첩사건 증거 조작, 해킹 프로그램 구매…일일이 나열하기도 벅찰 정도로 수많은 불법을 저지른 국가정보원에 무엇을 믿고, 무슨 일을 시키려고 더 강한 권한을 주려고 하는가.”


성균관대 로스쿨 학생 박용흘(26). 그는 “로스쿨 중심의 전국 인권법학회 연합 인;연의 성명서를 읽은 것”이라고 했다. 그의 뒤에서 두 사람이 각각 ‘테러방지법 반대하는 더불어당은 테러리스트 양성소’ ‘테러방지법! 국민의 입을 도끼로 찍는 것’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의사당을 향해 걸으며 필리버스터를 한 의원들을 떠올렸다. 그중 인상적이었던 이는 문병호 국민의당 의원이었다. 가장 짧은 시간(1시간49분) 단상에 섰지만 가장 일목요연하게 테러방지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테러 예비·음모 등을 하였다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라는 규정은 너무 모호하고 광범위합니다. 부칙으로 다른 법률, 즉 통신비밀보호법 등을 개정하는 건 법 원칙을 무시한 것으로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습니다. ‘좌익효수’나 선거 댓글 사건에 연루된 요원들이 모두 정상적으로 국정원에 근무하고 있고, 국정원이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상황에서 더 많은 권한을 준다는 것은….”


본회의장이 내려다 보이는 의사당 4층 방청석에 앉았다. 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여야 의원 10여 명 앞에서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었다. 방청석엔 50여 명이 앉아 있었다.


“이 휴대전화가 뭐라고, 맘대로 들여다보려고 합니까.” 이 의원은 동백림,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그리고 자신이 당했던 구타와 물고문을 이야기하며 김지하·김남주·하이네의 시를 낭독했다. 여당석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의제와 관계 없는 얘기 그만하세요.” “OECD에서 3개국 빼곤 대테러법이 있잖아요.”


순간 방청석 왼편에서 “조용히 합시다”가 들렸다. 중년 남성은 자신을 제지하는 방호원들에게 “내가 범죄자야?” “한나라당, 뭐 하는 짓거리들이야”하고 목청을 높였다. 그가 퇴장당한 뒤 한 젊은 여성이 방호원에게 물었다. “(방청객은) 왜 의견 표시를 하면 안 되나요?”


오후 9시5분. “하나 둘 셋.” 본회의장 입구 ‘국회 마비 121시간째’ 입간판 옆에서 여당 의원 대여섯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독사진도 찍어줘요.” 한 사람씩 카메라 앞에 섰다. 반대편엔 ‘국민 기본권 지키기 무제한 토론 121시간째’가 놓여 있었다.


오후 10시55분. 이 의원이 내려온 단상에 같은 당 홍종학 의원이 올라섰다. 그는 성장률 하락, 국가부채 증가, 고용 불안을 그래픽과 표로 나타낸 스케치북을 펼쳤다. “진짜 국가비상사태는 테러 위협이 아니고 경제입니다. 대한민국이 망해가고 있는데, 국민들이 울고 있는데….”


날짜 변경선을 넘긴 새벽 2시40분. 방청석을 나오다 마주친 국회 직원은 본회의장 전구가 걱정이라고 했다. “며칠씩 24시간 불을 밝히다 보니 과열돼서….” 그때였다. 문득 어린 자녀 둘과 방청석에 앉았던 여성의 한마디가 스쳤다. “국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민주주의가 어떤 건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 소수의 발언권을 보장해주는 필리버스터는 답답하고 피곤하며 비능률적인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의회민주주의다. 국회는 마비되지 않았다. 대통령이 아무리 책상을 내리쳐도 의사당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그렇게 민주주의가 된다. 중요한 건 필리버스터, 그 다음이다.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정치가 왜 중요한가?’ 묻는 과정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지속되고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새벽 3시. 국회 정문을 나섰다. 매서운 추위가 소매 속을 파고들던 그 시간에도 한 시민이 의자에 웅크린 채 유인물을 읽고 있었다. “저 안에서 계속하고 있는데 우리도 멈추지 말아야죠. 저녁은 드셨어요?”



- 중앙일보  권석천 논설위원 -



<출처 : http://news.joins.com/article/19652898?ct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