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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한종 - 이름값 못하는 정부기관들

irene777 2016. 3. 7. 03:27



[정동칼럼]


이름값 못하는 정부기관들


- 경향신문  2016년 3월 1일 -





▲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 (역사교육학과)



일본대사관 앞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노숙하고 있는 지킴이 대학생들에게 방한 텐트를 지급해달라는 서울변협의 긴급구제 신청을 국가인권위원회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권의 중대한 침해가 없으며 농성자들의 생명권이 위협받을 정도로 긴급한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겨울에 60여일째 노숙하면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여기에서 인권위의 결정이 정당한지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권위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으면 하는 생각에 아쉬움을 감추기는 어렵다.


인권위는 인권의 보호와 향상을 위한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기관이다. 인권위는 이런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입법, 사법, 행정 3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기구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권위도 국가 기관이므로 정부의 정책과 무관할 수 없다. 더구나 11명의 인권위원 중 4명을 대통령이 지명하며, 여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회에서 4명을 선출한다. 인권위가 정부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는 조처를 취하기가 쉽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구성이다. 그렇지만 인권위의 역할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일이다. 약자들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서로 달리 해석할 수 있는 문제에서는 이들의 편에서 생각하고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인권위의 역할일 것이다.


우리는 정부 기관들이 자신의 업무나 역할과는 어울리지 않는 활동을 하는 것을 너무도 흔히 본다. 고용노동부는 양질의 일자리를 확보하고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행정부서이다. 그러기에 고용노동부는 노동자들의 편에서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도 고용노동부가 그런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보다는 정부의 노동정책을 뒷받침하는 데 업무의 우선순위를 두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 홈페이지는 이른바 ‘노동개혁입법’의 처리를 촉구하는 팝업창을 메인에 띄우고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노동단체들이 한목소리로 반대하는 그 법안이다. 입법의 명목으로 청년에게 일자리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임을 내세우지만, 정작 그 ‘청년’들에게서도 지지의 목소리를 찾기는 어렵다. 노동자들이 반대한다면, 다른 정부기관이나 행정부서들이 입법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고용노동부는 적어도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 자신의 역할일 것이다. 정부 안의 다른 행정 기구들을 상대로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설득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기업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정책을 펼친다면 구태여 고용노동부가 별도로 존재할 이유는 없다.


얼마 전 정부가 개성공단 폐쇄를 결정하자 통일부 장관은 개성공단에 유입된 돈의 70%가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에 사용된 정황이 있다는 주장을 했다. 개성공단 폐쇄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를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발언이 사실이라면 유엔 안보리 결의안 위반이라는 비판이 나오자, 통일부 장관은 서둘러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통일부는 남북대화와 교류·협력, 한반도 평화 정착을 업무로 하는 행정부서이다. 정부 안의 다른 부서들이 개성공단의 폐쇄와 북한과의 단절을 주장하더라도, 통일부는 개성공단의 유지와 남북 대화의 지속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통일부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통일부는 그런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개성공단 폐쇄라는 정부의 정책만을 충실하게 따를 뿐이다.


이런 문제점은 여성가족부나 교육부도 마찬가지이다. 여성가족부는 한때 일본군 ‘위안부’ 교육자료까지 만든 적이 있지만, 우리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의 합의에 반발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에는 애써 침묵하고 있다. 교육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육의 자율성과 창의 인성을 강조한다. 암기 위주의 지식 교육이 아니라 학생들의 사고력을 높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서도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정부 방침에는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채 실행에 옮기는 데만 전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정부 정책이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부서들 사이에 다른 의견을 내면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정책이 추진력을 잃게 된다고. 그러나 국가 기관은 각자 맡은 업무가 있으며, 그 업무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 국민들이 존재한다. 국민들 편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해당 기관의 본연의 책임이다. 그것이 국가 행정의 민주적 의사결정이며, 나아가 정부 정책이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길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3012053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