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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희종 - 정치가를 찾습니다

irene777 2016. 3. 7. 03:48



[정동칼럼]


정치가를 찾습니다


- 경향신문  2016년 3월 3일 -





▲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한국과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과제가 대두되고 있다. 겉으로는 종교나 이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지구촌 여러 문화권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고유한 삶의 방식이나 문화, 자원을 제한하고 누리지 못하게 하는, 소위 ‘세계화’라는 가진 자들의 가치 속에 이와 같은 과제, 명분이 생긴 게 아닌가 한다.


테러는 남북 분단의 현실 속에 미국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대한민국에서 매우 잘 통용되고 유통되는 주제이다.


미국에서도 아이폰의 보안 기능을 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연방수사국(FBI)의 요구에 대하여 애플은 이를 공식적으로 거절한 바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많은 이들의 정치 무관심 내지 정치 혐오 속에 ‘테러방지법’이라고 하는 국가정보기관의 무소불위 기능 강화 법안이 등장했다.


‘테러방지법’은 그 독소조항으로 인해 ‘국민감시법’, ‘국정원 공룡법’이라는 호칭까지 얻었다. 하지만 국회의장의 직권 상정으로 인해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 행위인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야당 국회의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 진행 과정이나 의미는 이미 많이 보도되고 거론되었기에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그 종료 모습은 너무나 정치적이었다.


제1야당 이종걸 원내대표는 김종인 비대위 대표의 “이러다가 선거 망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라는 매우 현실적인, 그러나 지극히 정치적인 호통에 필리버스터 유지의 뜻을 접었다고 한다. 선거구 획정이나 곧 있을 총선 등과 맞물려 필리버스터의 한계도 분명한 상황에서 국회 기능과 선거를 망쳤다는 책임론으로 몰아세울 새누리당의 정치 행보도 고려한 결정으로 보인다.


돌이켜보면 요즈음의 한국 상황은 국제 외교무대에서의 혼란이나 막대한 재정 및 가계부채, 양극화로 침체되어 가는 국내 경제와 사회 현상 등을 놓고 볼 때 결코 심상치 않다.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 속에 신음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물론, 청년층의 취업 문제는 ‘헬조선’이라는 말로 압축되어 장차 우리 사회를 책임질 미래세대로부터 희망을 빼앗고 있다. 소수의 기득권층이 국민 다수의 삶을 억압하는 모양새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상황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구나 내부 분열과 자중지란을 일삼고 있는 무능한 야당을 보고 있노라면, 더욱더 무기력과 좌절 상태에 빠지고 만다. 민생을 챙기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율해 나가야 하는 정치현장. 그곳에는 최소한 세 가지 유형의 정치인이 있다.


눈앞의 이익만 좇으면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에만 몰두하는 정치꾼, 현안 갈등을 풀어가되 타협하는 정치인, 그리고 현안에 대한 당장의 ‘잡음 없음’이나 상황의 해법보다는 정치인으로서의 진정한 존재 이유를 체화하고 있는 정치가들이라는 세 집단이다. 정치가라면 갈등 현안에서 나라와 국민의 미래에 대한 가치를 제시하고 이를 위해서 한 몸을 던져서라도 타협하지 않고 전향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필리버스터는 그동안 변화의 실마리 없이 식상한 모습으로 부유(浮遊)하던 한국정치 지형에서 나름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야권의 패기 있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있던 정치 무관심이나 정치 혐오를 극복할 좋은 사회적 경험과 참 정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치가를 발견할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과정에서 여야 정치꾼들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고, 비록 소수의 정치인은 있었으나 기대하던 정치가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다.


위기는 기회라고 한다. 그러나 현 시국에서 국민의 마음을 읽고 국가 미래까지 녹여내어 새로운 희망을 보여줄 역동성 있는 정치가를 기대하는 것, 그 자체가 성급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정치가는 필리버스터에서 혼신의 힘을 다한 젊은 의원들이 초심을 지키며 노력할 때 큰 바위 얼굴처럼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가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당장의 정권 교체나 국회의원 당선자 수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기보다는 “선거 망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라는 호통에 당당하게 ‘내가 책임지겠소’라고 말할 수 있는, 국민 여망에 따라 때로는 저돌적인 통 큰 정치가가 있을 때 암울한 ‘헬조선’에도 희망이 생길 것 같다.


박근혜 정부에 의한 ‘테러방지법’ 통과를 지켜보면서,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진정한 정치가가 나타나 우리 사회에 새 바람을 일으켜 주길 기다려본다. 아직 희망은 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308&artid=201603032052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