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전시대라 불리던 1970~80년대에는 소련(소비에트 연방)과 그 위성국들인 동유럽의 유명 과학자/스포츠인 들의 서유럽/미국 망명이 심심찮게 발생했습니다. 그러면 체제 선전의 좋은 뉴스거리가 되기도 했지요. 그런 중에는 예전에 소개드렸던 체코 출신 자노바(1949,50 월드 챔프)나 볼로조바/프로토포포프(1964, 1968 올림픽 금, 소련) 같이 당대의 유명 스케이터도 있었는데 그런 일 후에는 다른 선수들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고 해외 원정을 제한하기도 했던 때가 소위 냉전시대입니다.
그 시기에 동구권 선수들이 대회 참가 외에 가질 수 있었던 서유럽/북미 경험은 탐 콜린즈 씨가 ISU와 제휴해 월드 후 그 입상자들을 중심으로 피겨가 성행하지 않은 나라들에 계몽성 쇼를 보여주었던 "챔피언스 온 아이스"가 있었고 아이스 댄스의 전설 크리스토퍼 딘/제인 토빌이 주관해 벌인 "러시안 올스타 쇼"가 있었습니다. 이 쇼의 러시아 측 파트너는 다름 아닌 타티아나 타라소바로 그녀가 쇼 안무를 담당했었습니다.
그 쇼는 1990년 1월 24일의 러시아 출연진 4명의 망명 사건으로 인해 중단됩니다.
그 4명은 당시에는 그다지 유명한 월드 챔프 급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우리가 지금 잘 알고 있는 유명 코치도 있고 이후 미국 아이스 댄스 챔피언이 된 이도 있습니다. 오늘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 봅니다.
이고르 쉬필방드..세계 아이스 댄스에 대해 아는 척 하려면 이 사람 이름을 안 끄집어낼 수 없는 아이스 댄스 코치죠. 마리나 주에바 씨와 함께 차린 미시건의 아이스 댄스 클럽은 성지가 되고 불세출의 스타 버츄/모이어, 데이비스/화이트, 시부타니/시부타니가 2011 월드에서 전무후무한 "같은 코치 아래 선수들의 포디움 독식"을 이끌어낸 주역, 그도 이 1990년 1월 24일 망명객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2012년 주에바 씨와 결별하고 미시간 노비에서 독립해 초크/베이츠, 쿰스/버클란드 등을 지도 중이고 현재 우리 민유라/가멜린 조의 코치이기도 하지요.
그와 다른 망명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1990년 1월의 사건을 재구성해 봅니다.
일단 이 1990년 러시안 올스타즈 투어 멤버는 아래와 같았다고 합니다.
Marat Akbarov
Violetta Andreeva
Elena Bogolyubov
Vladimir Bogolyubov
Elena Garanina
Leonid Kaznakov
Elena Krykanova
Yuri Ovchinikov
Veronika Pershina
Oleg Petrov
Igor Shpilband
Valery Spiridonov
Gorsha Sur
Alexander Svinin
Olga Volozhinskaya
Inna Volyanskaya
Igor Zavozin
Irina Zhuk
이 중 빨간 색으로 표시된 4명이 탈출해 망명합니다.
(스비닌과 이리나 주크 부부는 김 레베카/끼릴 미노프의 코치죠..)
이들은 특히 주니어 시절 상당한 경력을 발휘했던 선수들인데 엘레나 크리카노바는 나중에 파샤 그리슉과 한 조가 되어 94, 98 올림픽 2연패를 하는 플라토프의 파트너로 1984~86 주니어 월드 3연패를 이루었던 선수입니다.
베로니카 페르쉬나는 1966년 생으로 1980~85까지 월드에 나왔던 페어 선수인데 이 당시는 은퇴 후 프로/코치였으며 나중에 쉬필방드와 결혼 딸 카티아를 낳게 됩니다. 이후 이혼했지만....
이고르 쉬필방드는 아이스 댄서로서 타티아나 글라드코바와 함께 1983년 주니어 월드 챔피언이 되지만 1986년 그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현역은 은퇴할 수 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1985 주니어 월드 아이스 댄스 은메달리스트이자 1989 겨울 유니버시아드 챔피언이던 게오르기 고르샤 수르(1967년 생)는 이 당시 현역이었고요 이 쇼에는 그의 파트너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파트너였던 스베틀라나 리아피나는 바로 얼마 전 프랑스 연맹의 몽니 속에 고생하다가 러시아 선수가 된 자호르스키의 파트너인 게레로의 어머니입니다. 세상 참 좁습니다.
이 당시 쇼의 일원이었던 엘레나 보골류보프의 유투브 계정에 그 시절의 공연 영상이 있습니다. 이런 공연이었고요...
대략 한 달 정도의 공연이 끝난 후 이들은 뉴욕에 집결,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3일 정도 휴식 기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터뷰 자료에 의하면 이미 2주 전부터 이들 4명은 탈주를 모의했는데 그렇다고 소련에서 떠날 때 부터 망명을 생각했던 건 아닌 모양입니다. 일부는 현역이고 일부는 코치였지만 소련 사회에서 탈출하겠다는 목표만은 같았으므로 이들은 감시하는 KGB 요원들을 따돌리려고 호텔에 짐의 일부는 놓아둔 채 거의 맨몸으로 (물론 일부 출연료는 손에 쥐고 있고) 탈출합니다. 자료에 의하면 사실 KGB는 파견 선수 중에 위협 등으로 다른 선수들을 감시하는 소위 프락치를 심는데 게오르기 수르가 이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코치가 되고 싶었던 그는 감시자를 겸한다는 게 들통나면 선수들 사이의 신뢰도 문제가 되고 자신도 미국에서 코치할 기회가 더 많다고 생각되어 탈주합니다. 그들은 탈주 후 FBI에 연락했고 그들을 찾는 KGB 요원 투어 매니저를 피해 망명에 성공합니다.
탈출 이후의 삶은 그러나 모두 제각각입니다.
일단 쉬필방드의 경우는 좀 나은 편이었습니다. 한 달 후 디트로이트 스케이팅 클럽에서 코치 자리를 얻었고 같이 탈출한 베로니카 페르쉬나와 결혼 딸 카티아를 낳았는데 카티아 쉬필방드는 싱글 스케이터로 성장했으나 노비스 급 이후는 선수로서는 빛을 보지 못하고 현재 미시간 대학 간호대학에 재학 중입니다. 쉬필방드는 위에 적은 대로 세계적인 아이스 댄스 코치가 되어 있습니다.
이고르 쉬필방드와 결혼했던 전 페어 스케이터 베로니카 페르쉬나 역시 스케이팅 코치로 살아갑니다. 그녀는 미시간 앤 아버 스케이팅 클럽에서 코치로 재직 중이며 시간 당 코칭 비용이 $74인 꽤 고급 코치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 둥 유독 엘레나 크리카노바의 행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게오르기 수르의 인터뷰에 의하면 처음에는 같이 탈출한 4명과 투어 수행원 (행정 요원) 1명까지 5명이 같이 미국에 이민 온 러시아 가정에 피신해 있었는데 지니고 있던 돈이 떨어져 매우 곤란한 지경에 빠졌었다 합니다. 그래서 한 달 정도 후에는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된 것 같은데요 돈이 떨어져 접시닦이라도 해야 할 형편에 이르렀을 때, 역시 디트로이트 스케이팅 클럽에서 코치를 하며 아이스 댄싱을 계속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르네 로카는 1964년 생이니까 수르보다 3살이 위였는데 1980년 주니어 월드 아이스 댄스 동메달리스트였으며 1985/86년에는 파트너 아다이어와 함께 스케이트 아메리카, 스케이트 캐나다를 우승하고 월드 6위를 차지했으나 미국 챔피언 2연패에 실패한 1987년 월드 직전 돌연 파트너 아다이어가 은퇴해 버립니다. 이후 다른 선수와 팀을 이루었으나 목표로 하던 88 올림픽은 날아갔고 그 다음 시즌도 미국 4위에 그쳐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들 둘을 파트너로 엮어 준 것은 벨기에 출신 코치였고 둘은 파트너로 안착합니다. 원래 이들은 그냥 프로 스케이팅에서의 파트너로 시작했는데 1991년 ISU가 아마추어 자격에 관한 규정을 거쳐 프로 선수도 올림픽에 1994부터 참가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선수로서의 꿈도 키워 나갑니다. 문제는 수르의 국적입니다.
With Sur[edit]
| International | ||||
|---|---|---|---|---|
| Event | 1992–93 | 1993–94 | 1994–95 | 1995–96 |
| World Championships | 11th | 10th | 14th | |
| Skate America | 3rd | 3rd | ||
| Skate Canada | 3rd | |||
| NHK Trophy | 5th | |||
| Nations Cup | 4th | |||
| National | ||||
| U.S. Championships | 1st | 1st | 2nd | |
이들은 1993 미국 챔피언이 되고 월드에 출전 11위를 합니다. 하지만 망명한 지 얼마 안 된 수르가 미국 시민권을 얻어 올림픽에 참가하려면 미국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특별한 재능"에 대한 심의를 해야 하므로 1994년 1월의 미국 내셔널 우승 및 미국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헌데....미국의 올림픽 댄스 출전권은 1개 뿐....
이 때 미국의 내셔널 라이벌은 푼살란/스왈로우였는데 당연히 그들은 로카/수르의 국적 취득 문제를 물고 늘어졌으며 의회에 이것을 반대해 달라고 편지합니다. 이때문에 "소련 출신을 미국 대표로 올림픽에 내보낼 수 없다" 와 "그러면 파트너 미국 선수가 우수한 기량에도 손해 본다" 의견이 팽팽했고 심사가 늦어졌으며 심지어 아이러니컬한 것은 당시 이 라이벌 푼살란/스왈로우의 코치가 바로 같이 망명한 쉬필방드였습니다.
운명의 1994 미국 내셔널 때 사고가 발생합니다.
위 영상 처음 몇 분 동안 이 사고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두 개의 컴펄서리 댄스에서 1,2위를 나눠 가진 로카/수르 조와 푼살란/스왈로우 조의 오리지널 댄스 전 웜업 훈련 때 다른 선수와 르네 로카가 충돌해 업혀 나갑니다. 검진 결과 왼쪽 팔에 심각한 부상이 있어 출전할 수 없는 상태..미국 연맹은 로카/수르 조가 기권할 것이라고 발표햇습니다.
그러나 로카는 초인적 의지로 기브스를 한 채 경기장에 들어와 경기를 가집니다. 결과는 2위..아직 프리 댄스가 있기 때문에 둘의 대결은 마지막 날 결정될 예정이었으나....의사들의 만류로 로카/수르는 결국 기권하게 됩니다. 이로써 올림픽 출전은 물건너 갑니다. 1994 올림픽에 출전한 푼살란 조는 15위에 그치고요....
이들 로카/수르 조는 유럽 풍의 아이스 댄스여서 상당히 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 당시 미국 아이스 댄스는 대체로 볼륨 댄스 식이었거든요...
그들은 1995년 다시 미국 챔피언이 되면서 월드 10위로 미국의 다음 해 월드 티켓을 2장으로 늘리는 데 성공하고 또한 시민권과 올림픽 출전에 얽힌 아쉬운 스토리를 해피 엔딩으로 바꾸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하여 1996 월드에는 두 라이벌 조가 같이 출전했으며 그것이 로카/수르 조의 은퇴 경기가 됩니다.
그랬던 그들의 쇼 영상 세 개 정도 소개합니다.
이 당시 시끄러웠던 이유 중 하나가 "미국 국적을 너무 쉽게 취득하려 든다 올림픽 후는 다시 러시아인으로 살 것이다" 같은 미국인들의 편견도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수르는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오클랜드 아이스 센터 코치로 재직하며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 스포츠 관련 전문 변호사로도 활약했습니다.
냉전시대의 마지막 무렵....크게 유명하지 않았던 네 사람의 러시아 스케이터의 탈출과 망명, 그리고 그들의 인생 항로는 또 하나의 피겨 역사의 중요한 페이지였습니다. 이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미국과 캐나다에는 "러시아 선수/코치 모시기" 경쟁이 벌어졌으며 이것이 미국 스타일과 러시아 스타일의 피겨를 혼합하고 서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거든요..여기에 쉬필방드와 게오르기 수르가 코치와 선수로써 크게 한 몫을 한 것이죠.
1990년 1월 24일은 그렇게 현대 피겨 스케이팅의 중요한 모멘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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