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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진석 - 정신병 만드는 국민감시체제

irene777 2016. 3. 20. 02:37



[정동칼럼]


정신병 만드는 국민감시체제


- 경향신문  2016년 3월 13일 -





▲ 이진석

서울대 의대 교수



“안기부가 쫓아온다!” 그 환자는 대낮에도 커튼을 꽁꽁 닫아둔 채, 이렇게 외치곤 했다. 학생 시절에 정신병동 실습을 나가서 만났던 이 환자는 안기부가 자신을 감시하고 쫓아다닌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국가 대소사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을 안기부가 실제로 이 환자를 쫓아다녔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런 망상을 가진 정신질환자가 드물지 않았다. 정신과 의사들에 따르면, 요즘에는 국정원이 자신을 감시한다는 망상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특정의 누군가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해킹하고, 사생활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망상은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정신질환자의 망상은 비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망상도 현실을 반영한다. 평소에 본인이 공포의 대상으로 부지불식 중에 생각했던 것이 망상으로 표출된다. 작년에 흔했던 망상 중의 하나가 자신이 메르스에 감염됐다는 것이라고 한다.


한동안 정신질환자의 망상 대상에서 비켜나 있었던 국정원이 정신과 진료기록에 다시 등장할 것 같다. 세계 최장의 필리버스터에도 불구하고, 강행 처리된 테러방지법 때문이다. 테러방지법 통과로 국민은 언제든 자신이 국정원의 감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을 가지게 됐다. 국정원이 망상의 대상으로 화려하게 부활할 자격 요건을 갖춘 셈이다. 국민의 공포와 불안이 결코 과한 반응은 아니다. 최근 야당 국회의원, 당직자, 기자, 그리고 평범한 직장인 등을 대상으로 국정원과 검경이 무차별적으로 통신자료를 수집한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지금도 이럴진대, 앞으로는 어떨지? 안 봐도 훤하다. 이것만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정부는 사이버테러방지법까지 몰아붙일 태세다. 가뜩이나 스마트폰을 통한 사생활 노출의 불안이 큰데,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테러방지법과 사이버테러방지법의 영향은 기존 정신질환자의 망상 대상을 불특정한 누군가에서 국정원으로 바꾸는 데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공중파와 종편은 당장에라도 북한 특수부대가 침투해서 주요 인사를 암살하고 지하철 테러를 감행할 것처럼 대서특필하고 있다. 이렇게 테러를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국민은 큰 공포를 느낀다. 이런 공포는 정신질환자의 망상을 악화시키고, 잠재적 환자의 발병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


정부 여당과 보수언론의 공포 마케팅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북한과의 무력 충돌과 테러가 마치 우리의 일상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전쟁을 억제하고, 테러를 예방하는 것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 본연의 역할이다. 여기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어야 하고, 이것을 반대할 국민도 없다. 그러나 전쟁과 테러를 빙자해 국민의 공포를 인위적으로 조장해서 정치권력을 유지하려 한다면, 이것은 공포정치이다.


국민이 정치권력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공포는 다양하다. 가장 전형적인 유형은 국민감시체제로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고, 때로는 물리적으로 겁박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독재자가 흔히 활용했던 공포정치의 수단이었다. 국민이 알아서 복종하고, 자신이 의심과 억압의 대상이 되는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더 열성적으로 권력집단을 따르도록 만들었다.


무능한 정치권력에 의해 증폭되는 공포도 공포정치의 한 단면이다.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를 통해 국가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진실을 목도한 국민이 느낀 공포가 여기에 속한다. 최근에 공포의 사회학 분야 연구자들은 정치권력이 민생을 방치해서 야기된 삶의 공포도 공포정치의 일부로 설명한다. 경제침체와 부실한 사회안전망, 사회적 신뢰의 붕괴로 인한 불안과 공포의 일상화를 일컫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 처한 국민은 안정 추구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고 한다.


국민의 공포를 조장하는 것으로는 전쟁과 테러가 예방되지 않는다. 일상화된 삶의 공포도 해소되지 않는다. 정신병만 더 만든다. 지금껏 불법적인 정치공작과 여론조작에 몰두했던 기관이 전권을 가지고 국민을 보호해주겠다고 나서니, 오히려 더 불안하다.


전쟁과 테러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는 국민을 감시하려는 기관을 국민이 감시해야 한다. 애먼 짓 안 하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오는 4월13일 총선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참, 나도 어제 이동통신사에 통신자료 내역 확인 신청을 했다. 혹시나 해서…. 여기서 몇 발만 더 나가면, 정신병적 망상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308&artid=20160313210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