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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상희 - 주권자들이여 ‘기억’을 포기 말자

irene777 2016. 4. 6. 16:01



[정동칼럼]


주권자들이여 ‘기억’을 포기 말자


- 경향신문  2016년 4월 3일 -





▲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제 4월은 혁명을 잊었다. 오직 긴 침묵만 우리의 기억을 가로막는다.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시신은 세상을 바로잡는 혁명의 도화선이었으나, 50년 만에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건국절 타령과 이승만 국부 운운하는 역사왜곡에 파묻혀 그 혁명까지도 함께 떠나보내야 했다. 세월호의 기억은 이제 그 뒤를 따른다. 노란 리본은 사람들의 손에, 가슴에 단단히 매여 있지만, 그것은 무사귀환의 기원이기보다는 저 멀리 떠나보내는 추모의 표장이 되어간다. 그래서 4월은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던 겨울’의 한 끝자락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를 두고 동정피로라는 말이 나온다. 고통스러운 현실에 짓눌려 타인의 고통이 무감각해지고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시대의 냉혹함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동정 이상의 것이며, 그 피로 또한 우리의 선택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2년 전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충격을 준 것은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연민과 함께 우리도 언제든지 그 죽음에 내몰릴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공포였다. 세월호 참사는 이 나라 이 정부에 만연한 무능과 무책임이 만들어낸 구조적인 사건이자 어디서든 재발 가능한 항시적인 위험임을 새삼 인식하게 됨으로써 급격히 빠져든 집단공포였던 것이다.


그래서 피로라는 말은 현실을 비트는 췌사가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로가 아니라 증폭된 공포로부터 강요된 체념이다. 세월호 참사가 아이들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을 넘어 우리 모두의 안전과 생존의 문제임을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없는 폭력과 협박에 직면하게 되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국민의 안전보장책 마련이라는, 민주사회에서 너무도 당연한 우리의 요구는 그 자체 극단의 금기가 되어 가혹한 억압 대상이 되어 있다. 가차 없는 법의 칼날 뒤에 숨어버린 ‘대통령의 7시간’은 이 참사에 대한 현 정부의 과민반응을 제대로 상징한다.


이런 상황에서 세월호는 이중의 불안으로 중첩된다. 침묵하면 생명과 생존의 위험이, 발언하면 생계와 생활의 위험이 우리를 겁박한다. 체념의 집단의식은 이 딜레마로부터 나온다. 피로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도록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에 체념하고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죽은 자식 앞세운 돈벌이’라거나 ‘누군가의 사주’라는 세간의 불평들 역시 동정심이 고갈된 우리가 자기변명을 위해 내뱉는 수준을 넘어선다. 옛날 군사정권 시절 아이들의 입에서 국민교육헌장이 암송되고 <국제시장>의 국기배례가 전국에서 판박이로 반복되던 그 모습처럼, 그 워딩들은 도처에서 정확하게 반복 재생산된다. 그것의 실체는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하도록 강요된 말이라는 점에 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니며, 나는 종북좌파가 아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이 체제에서 안녕할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말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가혹한 폭력뿐인 이 세상에서는 저런 말이라도 해야만 주위에 팽배한 겁박으로부터 잠시나마 놓여날 수 있게 된다는 일종의 가학성 도피기제일 따름이다.


사실 이 시대가 강요한 체념은 도처에 있다. 노동법 개악에서부터 테러방지법이라는 극단적인 국가폭력에 이르기까지 20%의 번영을 위해 80%의 희생을 기획하는 상황에서조차 우리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그저 내 탓이려니 포기하게끔 강요당한다. 세월호의 체념은 이런 통치술의 가장 조악하고 가장 비열한 사례가 되어 그들의 권력이 욕망하는 바에 무한 봉사한다. 그리고 이 와중에 4월은 혁명을 빼앗기게 되고 우리는 희망을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체념은 기억을 조건으로 한 망각이다. 그것은 현실의 고통으로 인해 기억이 억제당함으로써 발생한 우울증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무엇보다 강력한 정치적 위력을 가진다. 애도하며 떠나보내지 못한 슬픔과 전혀 해소되지 못한 공포의 고통은 깊은 무의식 속을 파고들어 우리의 생존본능의 저변에 자리한다. 그래서 이 체념은 기억을 지워버린 망각과는 다른 힘을 가진다. 현실의 억압이 약화되거나 혹은 그럴 기미가 보이는 순간 그것은 강력한 행동으로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행동할 때에만 성공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은 이 점에서 의미 있다. 반세기 전 4월이 그러했듯이 세상을 바로잡을 우리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지식이 신체에 각인된 것이 니체의 본능이라면 세월호 참사의 아픈 기억이 세상살이 하나하나에 각인된 것이 우리 본능이다. 우리가 기억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의연히 주권자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4032038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