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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진석 - 투표하면 건강해진다

irene777 2016. 4. 12. 03:09



[정동칼럼]


투표하면 건강해진다


- 경향신문  2016년 4월 10일 -





▲ 이진석

서울대 의대 교수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을 올리는 것은 국민 건강을 향상시킨다. 투표율과 국민 건강이 무슨 상관이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투표율 제고가 국민 건강을 위한 핵심 정책 중의 하나다. 1999년 스웨덴 국립공중보건위원회는 국민 건강을 위한 8개 분야, 19개 국가 정책을 제시했다. 이 중에서 네 번째 정책이 투표 참여율 제고이다. 구체적으로는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이 60%에 미달하는 지역의 투표율을 5% 증가시키고, 외국 시민권자의 투표율을 10% 증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투표 참여와 건강의 관계는 복지 선진국인 스웨덴에서만 강조되는 주제는 아니다. 하버드, 스탠퍼드 등 미국 유수 대학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투표 참여는 삶의 질, 수명 연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투표율이 평균 이하인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건강수준이 열악하고,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투표율의 계층 격차가 큰 지역은 계층 간 건강 격차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투표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흔히 정책투표로 설명된다. 정당과 후보자가 내세우는 의료공약을 보고, 지지 정당과 후보자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국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의료정책의 향방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책투표가 실재하는지, 실재한다면 선거 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학계의 오랜 논쟁거리이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4대 중증질환 국가 완전 보장 공약과 문재인 후보의 의료비 100만원 상한제 공약이 격돌했다. TV토론에서도 중요 주제로 다루어질 만큼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선거 후의 여론조사를 분석한 결과, 의료공약에 대한 유권자의 판단은 투표행위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의료공약에 대한 판단은 원래 지지하던 후보자에 대한 지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지지 후보자를 바꾸는 수준의 영향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정책투표는 지극히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이론이지만, 현실의 투표행위가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치권과 유권자의 쌍방과실에 온갖 가십거리에만 매몰된 언론의 선거보도 행태가 더해진 탓이다. 정책선거를 방해하는 경마 중계식 보도로 선거판을 혼탁하게 만들어 놓고서, 정책선거 실종을 훈계하는 기사는 빠뜨리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언론의 이율배반적인 자화상이다. 스웨덴과 미국 등에서 건강을 위해 투표를 하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정책투표 때문이 아니다. 정당과 후보자가 내세운 공약과 유권자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투표 참여 자체가 국민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투표 참여는 사회적 결속력의 정도를 드러내는 징표인 동시에 사회적 결속력을 형성하는 동력이 된다.


최근에 사회적 결속력, 구성원 상호 간의 신뢰, 서로 돕고 사는 문화와 규범 등 ‘사회적 자본’으로 통칭되는 특성이 건강의 중요한 결정요인이라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 가와치 교수 연구팀은 지역별로 “당신의 주위 사람은 기회만 된다면 당신을 속여먹으려고 할 것이다”란 질문에 대한 동의율을 조사했다. 그리고 이 결과와 지역별 사망률을 비교해 보니, 다른 관련 요인들을 보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의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지역이나 집단은 건강에 이로운 정보의 확산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정책의 우선순위가 사람에게 맞추어지면서 공공서비스에 대한 접근성도 향상된다. 개인의 일탈적인 건강행동에 대한 사회적 지지와 규제도 잘 이루어진다. 예컨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을 발견했을 때, 공동체 의식이 높은 지역에서는 이 청소년을 자기 자식처럼 야단치는 어른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는 다들 나 몰라라 방치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적 자본은 사회 구성원이 건강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근간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청년 세대의 사회적 자본이 가장 취약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이다. 입시와 취업 경쟁, 부실한 사회안전망으로 인해 이들 간의 결속력과 신뢰, 서로 돕는 문화와 규범은 상실된 지 오래다. 온갖 사회적 불이익이 이들에게 집중돼 있고, 각자도생이 이들의 생존전략이 돼버렸다. 투표 참여는 흩어진 개인을 집단으로 묶어서, 이들 스스로 사회적 자본과 힘을 형성하도록 만드는 정치 행위이다. 청년 세대의 투표 참여는 미래의 우리 사회를 더 건강하게, 더 인간답게 만드는 투자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308&artid=201604102051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