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심판만으론 부족하다
- 경향신문 2016년 4월 14일 -
▲ 김준형
한동대 교수 (국제정치)
20대 총선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은 여권의 오만과 실정에 대한 심판이 마침내 내려졌다는 것이다. 과거 고비마다 불길같이 일어나 한국정치를 바로잡았던 국민들이, 최근의 주요 선거들에서는 실정을 거듭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정치 및 선거결과에 대한 책임과 실천은 일차적으로 정치가들의 몫이지만, 국민의 전략적 선택이 변화의 시동을 걸었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저급한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일”이라는 플라톤의 경구는 2400년 전의 철학자의 위대한 혜안이라는 점보다, 아직도 오늘날 우리 현실에 적확하게 들어맞는다는 한국정치의 후진성이 더 크게 다가왔었다. 다행히도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으로 우리가 다시 그런 벌을 받게 되지 않을 기회를 얻었다.
희망을 봤지만, 염려는 사라지지 않는다. 스멀스멀 더 큰 걱정이 밀려온다. 우려의 근거는 수두룩하지만, 그중에서도 두 가지에 주목한다. 먼저, 일정부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청중 민주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프랑스 정치학자 베르나르 마냉은 주권을 가진 시민이 정치가들을 선택하지만, 이후에는 정치가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심해지면 선거귀족정 또는 선거독재가 가능해진다. 한국정치가 온몸으로 이를 증명해왔다.
이것이 4월13일의 선거결과가 권력판도는 바꿨지만, 한국정치 및 국민의 삶을 바꿀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의 근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 권리나 의무를 행사하는 시점에서는 민감하지만, 내 손을 떠난 후부터는 관심을 거둬버리는 경향이 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세금이다. 탈세가 만연될 만큼 납세에 민감하지만, 내 손을 떠난 세금이 어디에 사용되는지에 대해선 둔감하다. 내 손을 떠난 세금처럼 내 손을 떠난 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현상이 반복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번 선거가 정책부재의 선거였기에 문제는 더욱 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변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행사한 표가 어떻게 정치가를 바꾸고, 정치가는 그 표가 어떤 결과로 다시 국민의 삶을 바꾸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기득권이 보수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왜 보수적이 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경제학자 베블런은 당면한 일상에서의 생존만으로도 힘겨운 빈곤층은 변화를 위한 정치적 행동을 해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현실이 힘겹지만 변화가 품고 있는 ‘알 수 없는 고통’보다, ‘아는 지금의 고통’을 차라리 견디고 말겠다는 가슴 아픈 체념인 것이다. 이것이 소득불평등이 심화되고 중산층이 몰락함에도 뻔뻔하게도 야당 탓만 하면서 부자감세를 유지해온 정권을 지난 8년간 참아온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바뀌면 나아질 수 있다는 신뢰를 주지 못한 야권의 책임도 물론 더해진다.
이제 분명한 심판이 내려졌다. 그런데 유권자의 현명함을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두 번째 우려를 떨치기 어렵다. 그것은 한목소리로 선거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정부·여당의 고백에 대한 진정성 때문이다. 독선과 불통이 특기인 정권이 하루아침에 환골탈태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정치적 생존을 위한 표피적 적응에 그치며, 정치적 위기국면을 이미지와 언론, 그리고 정치공작으로 뒤집어버릴 수 있는 정권이다. 더 나아가 야권에 기회를 주었음에도 실패한 것처럼 몰아가, 내년 대선에서는 되치기를 시도할 가능성도 크다. 이번 선거 기간 보여준 대통령과 여당의 오만함은 이전에는 은폐와 포장이라도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민낯이었다는 점에서 개선의 의지가 하루아침에 생길 것 같지 않다.
심판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노파심의 차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문제에 대한 우려이자 경고다. 바통을 넘겨받은 야권은 국민들의 주권행사가 정치를 통해 어떻게 다시 국민들에게 되돌아가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은 ‘민심은 무섭지만 청중은 무력하다’는 한국 민주주의의 약점을 믿고 준동하는 정치꾼들이 생기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4142147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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