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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준형 - 아직도 무섭다

irene777 2016. 5. 16. 18:38



[정동칼럼]


아직도 무섭다


- 경향신문  2016년 5월 12일 -





▲ 김준형

한동대 교수 (국제정치)



‘아직도 무섭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이 16강 진출을 확정한 직후 인터뷰에서 말한 “아직도 배가 고프다”의 패러디를 통해 오늘날 한국사회의 공포 트라우마를 표현한 것이다. 20대 총선 결과가 보여준 현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심판은 기적에 가까운 절묘한 선택이었지만, 그럼에도 기적이 우리들 사이를 망령처럼 떠도는 공포까지는 소멸시키지 못한 것 같다. 선거 이후 달라진 정치권의 풍경들과 언론의 논조들이 가져다주는 생경함으로 인한 막연한 불안감보다 훨씬 기저에 자리한 공포다.


공포를 자극해 언제든지 반격할 수 있는 기득권 지배세력이 여전히 무섭다. 이번 선거로 꺾였다고 하지만 글쎄다! 그런 평가는 보존할 가치를 중심에 두고 경쟁상대를 인정하면서 민의에 따라 개혁도 시도하는 이른바 정통보수 세력에 한해서만 유효하다.


그러나 이 나라는 강압적 힘으로 군림하고, 비판과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매카시즘적 극우기득권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기에 한 번의 선거결과로 달라지기 어렵다. 더욱이 여당은 작전상 후퇴하는 모습이라도 보이는 것 같은데, 그마저도 거부하는 권력 수장의 행태는 우리의 공포에 충분한 합리적 근거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1950년 미국에서 반공주의를 통해 반대세력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했던 매카시즘의 광풍은 한국에서 수십년간 더 거센 바람으로 휘몰아쳐왔다. 분단의 지속은 한국사회가 매카시즘에 취약하게 된 최초의 이유였지만, 이제 그런 차원을 넘었다. 지배 권력은 적을 늘 새로 설정하면 되고, 이슈는 늘 만들면 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늘 공포가 준비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화 30년에 과거의 위력을 상실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최근 선거들에서 북풍은 있었지만 효과는 반감됐다고 말한다. 그 증거로 총선 직전 대북 강경드라이브와 중국 내 북한식당 종업원 집단탈출 발표의 무리수가 선거결과를 바꾸지 못했다는 것을 제시한다.


정말 그럴까?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피지배계층에 대한 지배세력의 폭력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많은 경우 관습, 이미지, 문화 같은 상징적 모습으로 폭력을 행사하는데, 주류의 생각과 다르거나 저항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대중의 마음에 심는다.


물리적 폭력보다 위험한 것은 사람들의 생각까지 통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불평등하고 부당한 사회를 확대해도 불평하지 못하게 한다. 때로는 민주적 과정마저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암이 자라듯 민주체제 안에서 자라지만 결국에는 민주주의의 근본을 파괴한다. 대통령을 비판만 해도 종북이고, 전교조를 해충에 비유하고,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인다.


게다가 물리적 폭력도 간간이 섞어 상징적 폭력과 콜라보로 대중의 공포를 압박한다. 게다가 배후에서 국민들을 이간시키는데, 어버이연합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따라서 약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더욱 영악해진 매카시즘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공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을 분석한 로버트 그리피스는 매카시즘 광풍의 5가지 원인을 제시했다. 반공주의에 대한 공포, 냉전, 매카시의 고집스러운 성격, 공화당 당내 분열, 그리고 야당의 소극적 저항이 그것인데, 놀라울 정도로 현실 적용성이 높다. 특히 마지막 원인이 눈에 들어온다. 프레임에 저항함으로써 공포에 떠는 대중에게 용기와 희망을 줘야 했던 그들이 오히려 프레임에 갇혀 숨죽인 채 떠밀려갔던 것이다.


우리는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작정하고 만든 프레임은 이해하거나, 또는 이해를 구한다고 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실체 없는 조작된 프레임을 고친답시고 이해시키려는 순진함이나 비겁함은 상징적 폭력을 강화할 뿐이다. 그런데 승리한 야당은 여전히 자기검열, 어설픈 인기영합주의, 중도화, 그리고 돈 몇 푼 쥐여주는 식의 경제민주화 정도에서 타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는 국민들의 깊은 내면에 자리 잡은 본능 같은 공포를 극복할 수 없다. 분명 삶까지 위협받는 경제위기에다 빈부격차의 삭풍을 벗은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리더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승부를 걸어볼 시대정신과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공포를 진정한 변화의 비전으로 대체하는 사람을 대망한다. 그런 리더가 나타난다면 공포를 극복하고 변화를 선택하는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20대 총선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런 리더를 부르는 초청장을 던진 것이다. 공포로 인해 이제 살짝 문틈을 열고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인데, 다시 더 굳게 닫아버리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122055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