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기의 시시각각]
갈라파고스 새누리당
- 중앙일보 2016년 5월 20일 -
▲ 전영기
중앙일보 논설위원
새누리당의 지도부 붕괴 사태를 보면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드는 의문은 두 가지다. 박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게 정권재창출인가 친박야당인가. 박 대통령이 정권재창출을 원한다면 누구를 후계자로 지원할까. 어느 나라 집권자든 임기 말엔 정권재창출을 추구한다. 개인 권력의 연속성은 끊어져도 정당 권력의 연속성만은 유지하려는 정치적 본능 때문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정당 연속성보다 개인 연속성을 중시하는 듯하다. 임기 후에도 자신의 영향력이 유지되는 순도 높은 친박당을 만들려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4·13총선을 전후해 친박세력이 드러내고 있는 차기 정권 포기 행태를 설명하기 어렵다. 친박의 핵심 코드는 박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는 존재를 철저하게 추적해 제거한다는 것이다. 선거 전엔 유승민을 쳐냈고 선거 과정에서 김무성을 무력화시켰다. 선거 뒤엔 정진석의 변심을 응징했다. 진영과 이재오도 잘라 냈다. 원래 코드의 배신자를 끝까지 쫓아가 흔들어 대고 패거리 힘으로 끌어내리는 건 친노 패권주의의 방식이었다. 유권자는 친노의 주장보다 그들의 태도에 넌더리를 냈다. 친노가 폐족이 되고 10년 야당 신세로 떨어진 진정한 이유는 자기들끼리만 대화하는 싸가지의 문제였다. 친박은 짧은 시간에 친노보다 더 심한 패권적 태도를 노골화하고 있다. 유승민을 찍어 낼 때는 박 대통령이 혼자 나섰다. 김무성을 칠 때 대통령 대신 실세들이 움직였다. 정진석을 협박할 때는 실세들도 빠지고 친박 초·재선 20명이 패거리를 지어 전면에 나섰다. 이제 다음 차례는 ‘노빠’처럼 박 대통령을 종교적으로 모시는 ‘친박 대중’의 등장일지 모른다.
자신들과 코드가 다른 사람이 새누리당 후보로 나서 차기 대통령에 선출되느니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당 정권이 더 나을 수 있다는 파벌손익 계산서는 친박의 깊숙한 곳에서 은밀하지만 또렷하게 나오는 얘기들이다. 그들의 시나리오는 대략 이렇다.
“새누리당 대통령이 등장하면 박 대통령은 꼼짝없이 전직 대통령으로 활동반경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반면 새누리당이 야당이 된다면 ‘박근혜 총재’를 중심으로 똘똘 뭉칠 수 있다. 이들이 지금 같은 응집력으로 야당을 하면 과거 ‘김대중 당’에 못지않을 것이다. 차기 정권에서 친박은 폐족이 아니라 정통 보수당으로 대접받게 된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정치는 기획하고 작동한다. 정권포기 행태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박 대통령과 친박의 요즘 모습에서 이런 시나리오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박 대통령의 성정과 사고방식을 잘 아는 사람들은 박 대통령이 특정인을 후계자로 골라 키우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임기 중에 권력누수 없이 주어진 권한을 100% 행사하는 게 대통령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집권당에서 대선후보군의 부상이 최대한 억제되리라는 예상이 나오는 까닭이다. 다른 이슈도 그렇지만 특히 차기 문제를 박 대통령 앞에서 입에 올리는 건 불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 때 이회창 감사원장을 키웠고 김대중 대통령은 이인제·노무현을 부추겼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진작부터 대선 후보감들을 내각에 불러들여 자유 경쟁시킨 것과 대조적이다. 친박 안팎에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박 대통령이 선호하는 후계자라는 그럴듯한 얘기가 나돌고 있다. 충청권 대망론에 국민 지지율 1위인 반기문이 집권당의 후보가 된다면 차기 대통령에 근접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반기문은 집권세력의 요즘 사정을 관찰하면서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올라타 대선 게임에 참여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한다. 민심에서 고립된 새누리당의 도움을 굳이 받아야겠느냐는 인식이다. 반기문의 권력의지는 강해지고 있지만 집권채널은 반드시 새누리당일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대선 유력주자에 관한 한 새누리당은 완전히 빈집이 되는 셈이다. 도무지 사람이 없다. 외눈박이 종만 설치는 흉가 같다. 갈라파고스 섬처럼 교류와 진화가 중단된 곳. 그게 박 대통령이 원하는 당인가 보다.
- 중앙일보 전영기 논설위원 -
<출처 : http://news.joins.com/article/2005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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