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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진석 - 목숨을 건 노역

irene777 2016. 6. 9. 14:00



[정동칼럼]


목숨을 건 노역


- 경향신문  2016년 6월 5일 -





▲ 이진석

서울대 의대 교수



나의 아버지는 전봇대를 타던 전기노동자였다. 배움이 짧았던 그는 평생 전기공사 현장에서 일했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어머니의 덜덜 떨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가 작업 중에 감전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병원에 가서 봤던 아버지의 모습은 흡사 미라 같았다. 눈, 코, 입을 뺀 온몸이 흰 붕대로 감겨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3개월이나 입원치료를 받고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죽음 직전까지 갔었지만, 우리 가족은 회사를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소박했지만 행복했던 우리 가족의 삶을 있게 해 준 고마운 회사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 경향신문 기사를 보고 아버지가 조기퇴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공사 방법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전기를 차단하고 공사를 했지만, 지금은 전기가 흐르는 상태에서 공사를 한다. 게다가 절연막대를 이용해 고압전선에서 떨어져 작업하던 방법에서 절연장갑을 끼고 고압전선을 직접 만지면서 작업하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바꾼 이유는 정전 피해를 줄이고, 작업시간과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이다. 그 이후에 감전사고가 잇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전기노동자들은 “고압선을 만지는 것이 차마 인간으로선 할 짓이 아니지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다”고 말한다. 퇴직이 늦춰졌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고압전선을 직접 만지면서 일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마운 회사라는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지하철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을 하던 19살 청년의 노동 현실은 전기노동자의 그것과 판박이다. 전기노동자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전선에서 일했고, 청년은 지하철이 질주하던 선로에서 일했다. 잠깐의 멈춤이 허용되었더라면, 이들은 목숨을 걸고 일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잠깐의 멈춤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모든 노동이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불가피하게 누군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전기노동자와 청년이 매일 직면했던 위험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시민 불편과 비용 절감, 원청기업의 갑질과 기득권자들의 야합 탓에 강요된 위험이었다. 이들이 강요된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였다. 노동은 신성하다. 세상을 움직이고, 우리의 삶을 지켜준다.


그러나 생계라는 쇠사슬에 묶여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강요된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노동이 아니다. 현대판 노예 노동이다. 쇠사슬이 강철에서 생계로 바뀌었을 뿐이다.


두 사고의 차이점도 있다. 스크린도어 사고 직후, 서울메트로는 ‘작업자의 안전규정 미준수’가 사고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시민의 항의와 공분이 이어졌고, 결국 회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감전사고에 대한 경향신문 보도 직후, 한국전력은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공사 방법을 바꾼 이유는 작업자의 안전을 위해서였고, 감전사고의 원인은 공사 방법 때문이 아니라 ‘작업자의 안전규정 미준수’라고 적혀 있다. 안전을 우선으로 고려하기 위해 고압전선을 직접 만지면서 일하도록 했다니,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그러나 전기노동자 감전사고는 경향신문 이외의 매체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시민들은 이 사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고, 항의와 공분도 없었다. 보도자료는 아직도 회사 홈페이지에 버젓이 올라가 있다.


노동자가 노역이 아닌 노동을 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인식과 행동이 중요하다. 첫째, 기다려 주어야 한다. 잠깐의 멈춤은 노동자에게 생명줄이 된다. 내가 누리는 잠깐의 편안함이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라면, 이를 잠깐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따져야 한다. 제 자식, 제 부모에게 시키지 못할 일은 남의 자식, 남의 부모에게도 시키면 안 된다고, 힘없는 노동자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여 주어야 한다. 셋째, 잊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정치인이 스크린도어 사고 현장을 들렀다. 너나 할 것 없이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늘 그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늘 유야무야되었다. 망각의 이익은 힘 있는 자의, 망각의 피해는 힘없는 자의 몫이다.


인터넷을 통해 본 사발면과 스테인리스 숟가락 사진에서 한동안 눈을 떼질 못했다. 청년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값싼 노역의 수혜를 나도 나누어 누리고 있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미안했고, 사고가 불거지면 잠시 흥분했다가 이내 잊고 지내서 미안했다.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도록, 기다려주고, 그들 대신 따져 주고, 그리고 잊지 말자.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052035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