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국가와 가습기, 그리고 시민사회
- 경향신문 2016년 6월 7일 -
▲ 박원호
서울대 교수 (정치학)
가습기 안에 세균이 서식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으며, 그 세균이 깃든 수증기를 아이들이 흡입하게 되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물때가 끼기 시작한 가습기 탱크는 손을 넣어 씻기도 버거우며, ‘보이지 않는 곳’의 세균을 상상하게 한다. 이런 공포에 근거를 둔 걱정은 자연 가습기 세정제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하물며 이런 일에 무심한 나 같은 사람조차 광고를 보고 가습기 세정제를 사서 기침하는 아이 방의 가습기에 넣을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건망증인지 게으름인지만 아니었다면 마켓 구석의 그 세정제를 집어들 뻔한 것이 ‘무려’ 5년 전의 일이었다. 어느 날 방송에서 피해자들의 소식을 보면서 안타까워한 것도 그즈음의 일것이다. 그리고 5년의 시간이 흘렀다.
5년이라는 시간은 매우 긴 세월이다. 다행히 우리 집 아이는 무탈하고 건강하게 초등학생으로 성장하였고, 가습기 사건은 언제 있었던 일인가 싶게 잊혀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여러 공동체의 크나큰 사건들을 겪으면서,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행복과 평온함은 사실 우연한 선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었거나 애써 외면한 덕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5년이라는 시간은 매우 긴 세월이다. 무탈하고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한 수많은 피해 아동들과 희생자들이 있었고, 더 가슴 아프게는 책임을 회피한 정부와, 법인을 갈아탄 제조사와, 무관심한 대중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여온 피해자 가족들이 보낸 기나긴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 5년이라는 세월을 용서할 수 없다. 우리 일상의 평온과 안락이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보다도 극악한 책임의 방기와 윤리의 파탄과 공감의 부재 위에 모래성처럼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던져야 할 첫번째 질문은 지난 5년 동안 정부는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2011년 역학조사로 가습기 살균제의 피해가 확인되고 제품들이 리콜된 이래, 정부·여당의 입장은 시종일관 이것이 소비자와 기업 사이의 사안이며 정부가 개입할 일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국회에서는 여당의 반대로 청문회가 이뤄지지 못했으며 국회에서 발의된 몇 개의 특별법조차 3년 동안 국회에서 계류하다가 19대 국회와 함께 소멸했다. 그런 의미에서 검찰이 지난 4월 비로소 소환조사를 시작한 것은 매우 적절했지만 딱 5년 늦은 조처였던 셈이다.
물론 모든 것을 국가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부도덕한 기업과 줏대없는 용병 연구자들에게 면죄부를 줄 의도는 추호도 없다. 그러나 기업들은 끊임없이 이윤 추구의 압박을 받을 것이고, 곡학아세하는 무척추 연구진은 필요하다면 항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들의 부도덕과 인성만을 탓하는 것은 구의역의 스크린도어가 고장이 났기 때문에 참사가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이들의 도덕률에 모든 것을 내맡기기에는 우리 가족의 생명과 안전이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이웃들이 천사인 나라에서 잘 작동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최악의 이기주의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에서도 그럭저럭 최소한의 질서와 안녕을 보장해줄 국가라고 홉스는 말할 것이다. 물론 우리의 국가는 도처에 있다. 내 월급에서 세금을 떼어가는 것도 국가이며, 2년 만에 교통범칙금을 40%나 더 성공적으로 징수한 것도 우리 국가이다. 그러나 정작 시민들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이 칼날 같은 경각 위에 놓였던 세월호에서도, 구의역에서도, 메르스가 할퀴고 지나간 입원실에서도, 그리고 가습기 안에도 국가는 없었다. 더 두려운 것은 이에 대한 반성의 부재이며, 또 언제든지 제2의, 제3의 사건들이 똬리를 틀며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다.
여기서 우리의 시민사회를 다시금 생각한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몇 개의 간헐적인 다큐멘터리를 제외하면 피해자 모임은 매우 외로운 싸움을 지난 5년 동안 감내했을 것이다. 우선 나 자신조차 사상누각 같은 일상에 가려 이들의 눈물을 살피지 못한 것을 반성하며, 늦으나마 여타 시민단체들과 정당들이 손을 내뻗어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피해 당사자들이 앞장서서 국가와 직접 맞싸우는 초현실적인 그림에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진 것이 아닌지, 우리가 오늘 연대의 손을 내밀지 않고 그들의 보호막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내일 저 자리에 내가 서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망각한 것이 아닌지.
국가주의자인 홉스조차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정치공동체를 구성하고 정부에 권한을 위임한 이유는 최소한의 권리인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설파한다. 우리의 국가는 시민들의 생명권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얼마나 유능하게 지키고 있는가.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072049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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