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발]
산 채로 썩어가는 나라
- 한겨레신문 2016년 6월 16일 -
▲ 정남구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당나라 현종의 셋째 아들 이형은 여섯살 나이에 안서대도호란 직책에 임명됐다. 변방 이민족을 상대하는 오늘날의 대사 비슷한 자리다. 어린애가 뭘 안다고? 걱정할 일 아니었다. 그는 수도 장안에서 녹봉만 받고, 실제 일은 현지에 따로 둔 관리들이 했다. 중앙에서 지방의 일을 본다고 하여 요령(遙領)이라 했다.
현종은 황제니까, 뭐든 못하랴. 그런데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의 박근혜 정부에서도 공공기관에 ‘요령’ 비슷한 낙하산이 수도 없이 내려앉았다.
“청와대 몫이 3분의 1이고, 금융당국이 3분의 1,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산업은행 몫이었다.”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은 얼마 전 산업은행 계열사 인사가 이렇게 이뤄졌다고 털어놓았다. 대우조선은 산업은행의 가장 큰 자회사다. 15일 <제이티비시> 보도를 보면, 대우조선에선 이명박 전 대통령의 후보 시절 사진사도 2011년부터 2년간 고문으로 일하면서 1억원 가까이를 받았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사외이사를 정치권, 관료 출신이 대부분 차지했다. 불과 몇주 전에도 대우조선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 시절 인수위원을 맡은 정치권 인사를 사외이사로 내정했다. 비판이 들끓자 당사자가 사퇴하긴 했지만, 그 대범함과 일관성이 참으로 놀랍다.
나라살림을 권력투쟁의 전리품처럼 여기는 듯한 조짐은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4대강 공사에 22조원을 쏟아부었고, 경인운하 건설에도 2조원 넘게 썼다. 그런 엉터리 공사에 나랏돈이 제대로 쓰였을 리 없다. 해외자원개발에는 35조원 넘게 투입했고, 여기서도 천문학적 규모의 손실이 났다. 단지 어리석어서 그런 황당한 투자를 했을까? 왕년의 한 정치인이 그랬다.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떨어진다고. 그게 누구 손에 들어갔을까?
부패는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 현 정부 들어서는 국가 안보에 쓸 돈을 허투루 쓴 방산비리가 수십건이나 드러났다. 30년 전에 만든 모델의 침낭을 지금도 납품받고, 병사들에게 엉터리 방탄복을 입혔다 한다. 수십개의 별이 연루되고 전 합참의장까지 기소됐는데, 아직 다 드러난 것 같지 않다. 오죽하면 방위산업과 관련한 비리 사실이 밝혀질 경우에는 이적죄에 준하여 처벌하게 법을 바꾸자는 말까지 나온다.
낙하산들이 설친 대우조선해양은 수조원의 손실을 감추고, 분칠한 경영실적을 내세워 나눠먹기 잔치를 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돈을 대준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에 자본을 확충해줘야 할 형편에 놓였다.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감사원이 국책은행의 자회사 관리 실태를 감사해 직원 3명의 문책을 요구했는데, 그들이 다 해먹었다면 소도 웃지 않을까?
“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강한 자긍심과 역사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 필요성을 설파하며 한 말이다. 그러나 나라에 대한 자긍심은 지난날에 대한 유치찬란한 미화로 생겨나는 게 아니다. 법과 정치가 국민이 사랑할 만할 때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국민의 애국심을 좀먹는 가장 큰 적은 공직 부패다. 나라살림을 피폐하게 할 뿐 아니라, 국민의 정신을 냉소와 비굴로 이끌어 황폐화시킨다. 이탈리아의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는 부패한 공직자에게 ‘뇌리에 박히는 처벌’을 해야만 사람들을 나라를 세울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을 못하고, 지금 이 나라는 산 채로 썩어들어가고 있다.
- 한겨레신문 정남구 논설위원 -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485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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