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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경집 - 백년대계인가, 백년하청인가?

irene777 2016. 6. 29. 18:11



[김경집의 고장난 저울]


백년대계인가, 백년하청인가?


- 경향신문  2016년 6월 23일 -





▲ 김경집

  인문학자






백년대계(百年大計)라 쓰고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 읽는다. 우리나라 교육이 바로 그렇다. 오죽하면 교육부만 없어도 교육이 제대로 선다고 말할까. 요즘 교육부는 돈으로 대학 길들이는 놀이에 빠졌다. 프라임사업 따위의 일들만 몰두한다. 근본대책이 아니라 미봉책 내밀며 따르면 돈을 주고 거부하면 압박한다. 대학입시도 전년과 같은 적이 거의 없다. 조금이라도 손을 댄다. 그 통에 학생들과 학부모들만 죽어난다.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 변화하려는 의지도 없다. 조삼모사에 조령모개만 쏟아낸다. 21세기 미래의 고뇌도 성찰도 부족하다.


고진감래(苦盡甘來)는 아주 비교육적이고 폭력적이다. 공부가, 학교 다니는 게 고통스럽다는 걸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 고통 견디고 이겨내면 달콤한 대가를 얻는다. 그리고 그건 개인의 몫이다. 예전에는 없는 집 아이도 그 대가를 누렸다.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과 신분의 상승이 가능했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시절이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교육은 신분 고착의 굴레가 되었다. 그런데도 교육은 변하지 않는다. 무의미한 무한경쟁만 난무한다.학생 시절 힘들고 지겨웠던 과목은 무엇일까? 수학이라는 답이 가장 많다. 무려 12년 동안 괴롭힌 과목이다. 시간, 돈, 에너지 가장 많이 쓴다. 그렇다고 졸업 후 쓸모도 별로 없다. 수학을 필요로 하는 이공대 말고는 수능 끝나면 수학과 작별이다. 수학을 통해 논리력, 사고력이 성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재미없게 그런 능력 길러야 하는 건 아니다. 이런 방식이라면 수학의 교훈은 딱 하나다. “얘들아, 인생 살다보면 하기 싫어도 해야 되는 일이 있단다.” 문과 학생도 그렇지만 의대생들도 고등수학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어려운 수학에 매달린다. 그것도 힘들고 어려운 방식으로 반복하며. 우리가 매조키스트가 아닌데도.


수학시간 미적분을 배울 때 모습을 떠올려보자. 누가, 언제, 왜 미적분을 고안했는지 가르치지 않는다. 그게 수학과 과학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언제 미분적 판단, 적분적 판단을 내려야 할지 알려주지 않는다. 다짜고짜 계산만 요구한다. 그러니 수학이 재미있을 리 없다. 그게 통했던 시절이 있었다. 20세기였다. 교육은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력에 호응한다. ‘속도와 효율’의 시대에는 빠르고 정확한 계산의 능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교육은 답을 빨리 습득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 능력으로 사회에서 인정받고 자신을 발휘했다.


하지만 21세기는 더 이상 속도와 효율의 시대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수학은 변함이 없다. 알파고 쇼크는 ‘빠르고 정확한 계산’의 능력이 끝났음을 보여줬다. 그런데도 수학 수업은 변함이 없다. 교육은 ‘과거의 사람이 과거의 방식으로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게 교육의 숙명적 한계다. 그래도 지난 세기에는 그게 통했다. 사회가 전체적으로 속도와 효율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아니다. 창의력, 상상력, 융합의 능력이 관건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그저 계산만 해댄다. 그것으로 점수를 매기고 미래를 결정한다. 시대착오요, 능력의 낭비며 폭력이다.


‘주요 과목’과 ‘기타 과목’이 존재하는 교육은 죽은 것이다. 그것은 ‘주요 인간’과 ‘기타 인간’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대체 왜 수학은 주요 과목인가? 지난 세기는 계산과 작동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능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들은 컴퓨터 알고리즘이 다 해결한다. 사회에서 작동되는 노동력의 형태도 이미 그렇게 변했다. 그런데 교육은 변함이 없다. 그러니 백년대계는커녕 백년하청이다.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된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혁명적 전환이 필요하다.


그 혁명은 의외로 간단하다. 수학적 능력이 필요한 이공계열, 경상계열의 경제학과, 회계학과 등은 높은 수준의 수학 능력이 필요하다. 도대체 법대, 의대 가는 데 높은 수학 점수가 왜 필요한가. 예체능도 입시 점수에는 무관하지만 학교 수학 수업은 이수해야 한다. 배점만 다를 뿐 계산만 하는 수학이다. 수학적 능력이 요구되는 학과와 대학은 다양한 수학 과정을 이수하고 점수에 높이 반영하면 된다. 그건 대학과정과 연계되는 수학의 질적 향상을 이끌 수 있다. 그게 이공계열의 경쟁력을 더 크게 만들 것이다. 그렇지 않은 학과는 기본적 수학을 이수한다. 거기에 수학의 역사, 수학의 응용 방식을 배운다. 그렇게만 해도 혁명은 가능하다. 어려운 게 아니다.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수학에 뺏긴 에너지를 다른 분야에 써야 한다. 여러 수학교사 설 자리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수학은 다른 모든 과목에 연계할 수 있다. 그런 다양한 방식으로 수학적 사고와 논리적 확장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관료는 변하지 않는다. 기존의 방식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육은 권력이고 기득권의 방벽이다. 통제와 길들이기에만 몰두한다. 교육철학보다 교육공학에만 몰두한다. 이러다가 망한다. 자신들은 꿀물이지만 다음 세대는 끝물이고 그다음 세대에게는 사약이다.


이제 끝내야 한다. 그런데 방법이 있을까? 수십년 변하지 않은 철옹성 교육부를 바꿀 수 있을까? 있다! 시민이, 학부모가 나서야 한다. 수학이 필요한 전공자에게는 수학을 제대로 가르치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수학의 기본개념과 정신을 가르치게 해달라고 ‘청원’하면 된다. 대학별로, 학과별로 난이도와 배점을 다르게 하라고 청원하면 된다. 물론 관료들은 쉽게 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청원하면 외면하지 못한다. 교육부에, 교육청에 청원하자. 그래도 교육부는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쉽지 않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도 않다. 이번에는 구의원, 시의원, 도의원, 국회의원 가운데 교육위원회에 속한 의원들에게 공동서명해서 청원하자. 여론을 확장시키고 공감을 이끌어내면 된다. 그게 미래를 망치는 게 아니라면 외면하지 못한다. 하물며 미래를 살리는 대안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생각이 있어도 혼자, 혹은 한 집단이 정부부처를 상대로 하기에는 버겁다. 그런 두려움이 우리의 미래를 포기하게 만든다. 연대의 힘을 믿어야 한다. 연대가 함께 머리띠 두르고 주먹 불끈 지르는 것만은 아니다. 생각을 공유하고 뜻을 함께하는 것이 연대다.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들 찾으면 된다. 21세기에 들어선 지 이미 16년이 흘렀다.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수학 공부에 대한 시스템부터 바꿔보자. 가능한 싸움이다. 투쟁이 아니라 섹시한 혁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이다. 미래를 위한, 우리 아이들을 위한.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232040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