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나쁜 정치’는 교활하다
- 경향신문 2016년 6월 26일 -
▲ 김광호
경향신문 정치부장
이것은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쁜 정치의 교활함, 비정함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한 사회의 위험에 대한 것이다.
‘구의역 19살 청년 가방 안에 컵라면,
허기지면 먹어야지, 일하다 일하다가,
엄마 말대로, 끼니 놓치지 않아야…,
몽키스패너, 기름때 눈물진 두 손에,
짧은 나무젓가락이 너무도 가볍다.’
서울 구의역 사고 뒤 지인이 보내준 짧은 글이다. 20대 시절을 학생운동으로 보낸 그였기에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부으며’(박노해 <노동의 새벽>) 토하듯 써낸 것일 게다. ‘눈물이 왈칵 나 화장실로 도망쳤다’는 댓글처럼 유난히 컵라면이 눈에 박힌다.
19살 구의역 청년은 서울메트로 외주회사의 막내 노동자였다. 소위 비정규직이다. 그는 기관사를 꿈꾸었고, 대학에 가기 위해 월급 144만원을 손에 쥐면 100만원을 저축했다. 컵라면은 그의 힘겨운 노동의 상징이면서 미래를 위해 유보한 ‘현재’였다. 꿈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그는 아직 살아 숨쉬는 이 사회를 믿고 꿈을 꾸던 청년이었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지난 20일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해선 누군가 양보가 필요하다. 정규직들이 우선 양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개혁 4법을 저지하는 귀족노조와 정치권이 노동인권을 이야기할 수 있겠나”고도 했다. ‘중향평준화’라는 기묘한 용어도 내놨다. 외국 정상을 만나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노동개혁을 추진하겠다”며 ‘노동4법’을 밀어붙이는 대통령 모습이 오버랩된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 ‘상류층’들인 건가.
노동을 ‘개혁 대상’으로 지목하는 청와대·여당 모습에서 우리 사회 기득권의 얼굴이 보인다. 성장 활력을 잃은 한국 경제의 위협은 노동이고, 차이를 만들어내며, 청년실업의 ‘헬조선’을 만드는 것도 노동이라고 한다. 성장을 위해선 ‘중향평준화’란 가면을 쓴 노동 권리 약화가 불가피하다고 한다.
과연 노동이 성장을 방해하는가. 노동을 약화시키고, 그래서 성장하면 한국 사회는 차이가 없어지고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가.
현실은 달랐다. 국내총생산은 2004년 826조여원이었다.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엔 1272조원을 넘어섰다. 8년 새 445조5000억원(53.9%)이 증가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2005~2010년) 일반가구 임금소득은 3370만원에서 3490만원으로 120만원(3.6%) 올랐다. 연평균 물가상승률 3.0%를 감안하면 실질소득은 뒷걸음질 쳤다.
성장의 과실은 기득권층의 자산소득으로 귀결됐다. 늘어난 비정규직은 임금소득 하락의 한 부분일 터다. 정 원내대표조차 “상위 10%가 전체 소득 절반을 차지하는 심각한 불평등은 경제의 구조적 문제”라고 실토할 정도다. <GDP의 정치학>의 저자 로렌조 피오라몬티는 각국 정부의 ‘GDP 정치’를 “불평등의 증가를 감추는 ‘통계적 세탁’이 되기 십상”이라고 비판한다. 정부가 수치 성장으로 실정을 가릴 동안 세상은 더 나빠졌다.
정부의 ‘노동 격차’ 운운은 빈부 격차를 정규·비정규직 격차로 바꿔치기하는 교활함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경제적 불평등 심화는 정치 권력의 불균형 심화로 이어지고 정치와 경제의 사악한 결합을 낳는다”고 우려했다. 딱 ‘노동4법’을 밀어붙이는 지금 한국의 모습이다. 한 사람과 한 가족에겐 전부인 노동의 권리를 생산과 효율의 소모품쯤으로만 여기는 인식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그 점에서 최근 유엔 인권이사회 특별보고관의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마이나 키아이 특별보고관은 국제인권기준과 부합하지 않는 중요 사례로 ‘파업으로 인한 손해에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파업권 본질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공권력이, 기업이 어떻게 지금도 노동의 권리를 약하게 하는지를 국제사회가 주목한 것이다.
산업화 이후 수십여년 ‘노동의 권리’가 커 온 과정은 수많은 전태일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스민 것이었다. 비정규직은 사회·경제적 약자로서 ‘노동’의 현재적 이름이다. 그렇기에 19살 청년의 죽음에 시민들은 ‘21세기 전태일’로 추모했다.
21세기 전태일은 노동 권리를 약화시키고 깊어 가는 빈부 격차의 희생양이지, 정규·비정규직 격차 때문일 수 없다. 정규직의 책임은 그들을 이런 탐욕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더 적극 나서지 못한 것일 게다. 노동의 자산인 ‘공감과 연대’를 못한 왜소함일 것이다.
부가 고인 사회는 절대 존립될 수 없다. 절대 권력은 부패할 뿐이지만, ‘절대 부, 고인 부’는 그 사회를 무너트린다. 이것은 교활한 정치도 꼭 알아야 할 이야기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262035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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