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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명섭 - 공화국의 발견

irene777 2016. 7. 5. 15:35



<아침 햇발>


공화국의 발견


- 한겨레신문  2016년 6월 28일 -





▲ 고명섭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교육적 의도를 앞세운 정치철학 교과서다. 도덕적 딜레마 상황을 제시하여 학생들에게 어떤 선택이 더 정의로운지 생각해보도록 이끈다. 그러나 샌델의 진정한 관심은 공화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밝히는 이 책의 후반부에 있다. 샌델이 강조하는 공화주의의 핵심은 공동선의 구현이다. 공동선을 구현하려면 ‘좋은 시민’, 곧 시민정신으로 무장한 시민이 있어야 한다. 시민정신이란 달리 말하면 공동체에 대한 공동의 책임의식이다. 이런 책임의식은 권력자가 위에서 지시한다고 해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가슴속에 공동체가 나를, 우리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믿음이 확고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샌델은 시민정신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사회적 악으로 불평등을 지목한다. 소수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다수가 거기에서 배제될 때 시민정신과 책임의식이 자랄 수 없다. 샌델이 생각하는 공화국은 평등과 연대 위에 구축된 공동체다.


샌델의 논의가 보여주는 바대로 공화주의는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 깊숙이 파고들어 따져 보아야 할 정치적 주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공화주의는 여전히 친숙하지 않은 개념이다. 의미가 모호할뿐더러 때로는 반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 일차적인 원인을 찾으려면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정치 경험을 돌이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의 검은손을 움직여 만든 정당이 민주공화당이었다. 공화당을 수족으로 거느린 박정희는 민의를 짓밟고 종신집권을 꾀했다. 공화당은 1인독재·인권탄압·폭압정치의 동의어였다. 민주공화당에는 ‘민주’도 ‘공화’도 없었다. 박정희 체제는 ‘겨울 공화국’, 공화정신이 얼어붙은 반(反)공화국이었다.


박정희가 1963년에 펴낸 <국가와 혁명과 나>는 박정희의 속마음이 드러난 문제적 텍스트다. 제목에서 벌써 국가와 혁명과 나를 동일시하는 사고, 다시 말해 국가가 곧 나이고 내가 곧 국가라는 사고가 표명돼 있다. 이 전제군주적 사고는 ‘10월 유신’이라는 제2의 쿠데타를 거쳐 리바이어던과 같은 괴물의 모습으로 현실이 됐다. 나라를 박정희의 사유물로 만드는 것이 ‘유신=혁명’이었다.





공화국(republic)의 라틴어 어원인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는 공공의 소유물을 뜻한다. 국민 전체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나라가 ‘레스 푸블리카’다. 박정희에게 공화국은 ‘레스 푸블리카’가 아니라 ‘레스 프리바타’(res privata), 곧 개인의 소유물이었다. 유신 공화국은 박정희 개인의 나라나 다를 바 없었다. 공화국의 정신은 배반당했고 의미가 거꾸로 뒤집혔다. 공화국이라는 말은 불신과 반감으로 물들었다. 암울한 시대의 기억은 공화주의의 정치적 상상력이 꽃필 토양을 빼앗았고 공화주의 이념을 학습할 기회를 박탈했다. 박정희 사후 30년이 지나서야 공화주의는 학술적 시민권을 되찾았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만큼이나 공화국과 공화주의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모든 구성원이 공동체의 주인으로서 공동으로 참여하고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것, 이 공화의 정신은 국가를 사유화하는 특권세력의 지배를 거부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나라가 나를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믿음이 있을 때 생겨난다. 국가가 특정 집단·지역·세력만 편애할 때, 거기서 보편적인 헌신과 책임이 나올 수는 없다. 지금 이 나라는 좋게 봐줘도 반쪽 공화국이다. 온전한 공화국을 향한 정치적 상상력을 불러내야 할 때다.



- 한겨레신문  고명섭 논설위원 -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00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