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회-생각해보기

<칼럼> 김인국 - 백남기와 이건희

irene777 2016. 8. 4. 18:18



[사유와 성찰]


백남기와 이건희


- 경향신문  2016년 7월 29일 -





▲ 김인국

청주 성모성심성당 주임신부



이러다 망할 수도 있겠구나 싶은 아슬아슬한 시간이 째깍거리며 우리 주위를 빙빙 맴돌고 있다. 마땅히 어질어야 하는 사람들의 타락과 불인은 어느 시대나 무서운 파국의 원인이었다.


“기울기는 하였으나 엎어지지는 않았고, 터지기는 했으나 무너지지는 않았다. 다 어진 이와 군자의 심력이 그리한 것이다.” 이게 지금 우리 이야기라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말없이 자리를 지켜주는 착한 사람들 덕분에 아직 살 만한 세상입니다”라는 식의 얼렁뚱땅 위로조차 들리지 않고 있다. 대대로 부패의 오물을 청소하고, 탐욕의 육중한 무게를 지탱해 주느라 허리가 휘어버린 사람들에게 더 이상 그럴 힘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일까. 하기야 꿩도 먹고 알도 먹어야겠다는 식으로 탈탈 털어댔는데 남은 게 있을 턱이 없다.


권세 휘두르는 재미에 날 새는 줄 모르다가 어두운 행적이 들통나서 난감해진 저 고관대작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악어들의 추문을 듣고 있자니 그렇잖아도 견디기 힘든 여름이 참담하게 느껴진다. 대뜸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로마서 7:24)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그들이 “이거 참 망신이로고” 하며 부끄러워했는지, 아니면 “재수가 없으려니 원” 하며 분통을 터뜨렸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경우나 얼굴은 붉어졌으리라. 사람이니까.


그런데 물어보자. 인간은 원래 시답지 않은 존재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다 생겨나서/ 실없이 살다가/ 어이없이 가더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성경의 시인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 “(하느님),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시편 8:5)


누구나 귀한 목숨이라는 말은 참 고마운데, 어째서 하는 짓들이 모질고 사나운지 모르겠다. 저밖에 모르고 남 잡아먹을 생각, 남 놀려먹고 부려먹다가 내다 버릴 생각뿐이잖나. 옛 사람의 진단은 이랬다. “귀하게 되고자 함은 사람들이 다 같은 마음이나 제 속에 귀한 것이 있어도 생각하지 않는다.”(<맹자> ‘고자상’편) 자신이 귀한 이유를 밖에서 찾아 헤매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란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게서 멈추지 않는다. “사람이 새나 짐승과 다른 점은 아주 적다. (아주 적은 것을) 여느 사람들은 버렸는데 참사람은 간직한다.”(<맹자> ‘이루하’편) 그것이 없으면 금수나 다름없게 되는데 귀한 그것을 팽개친다니! 제발 그러지 말라는 소리가 성경에도 나온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그것들이 발로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리고 가진 바를 다 팔아서라도 반드시 가져야 하는 진주, 영적 보화를 품은 사람은 가진 진선미로 살면서 신망애 삼덕을 쌓는다. 반면 그 귀한 것을 내다버리거나 팔아치운 사람은 짐승의 세 가지 독한 성질, 탐진치(貪瞋痴) 삼독으로 지내며 삼악을 저지르게 된다. 어려서 만화를 읽으며 다 배운 이야기다. 인간의 폭력성과 탐욕과 음란을 상징하는 <서유기>의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요즘 정계, 법조계, 재계의 민낯이다.


한편 성경은 금수저보다 흙수저가 행복하다고 단언한다. 금수저가 잘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실컷 해보고, 실컷 누려보고, 실컷 먹어보는 것뿐인데 저 ‘실컷’의 단꿈에 취하다보면 영영 사람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람됨을 단념했다가는 개·돼지에게 물려 개·돼지만도 못하게 된다고 했으니 삼가고 조심하는 게 신상에 이롭다.


너무 오랫동안 의식도 기력도 되찾지 못한 채 병원에 누워 있는 두 노인을 생각한다. 한 분은 2014년 5월10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다른 한 분은 2015년 11월14일 경찰이 쏜 직사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해남 사람 가톨릭농민회 백남기씨다. 산 이력이야 너무나 다르지만 연배는 엇비슷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애타는 마음도 똑같다. 부디 기사회생하셔서 단단히 망조가 들린 나라에도 교훈을 나눠 주시기 빈다. 사지에서 돌아온 노인의 슬기라야 끝 모르는 욕망과 교만을 다독거릴 수 있을 터.


“우리 중에 잘사는 사람은 어쩌면 남의 복을 빌려서 그런 건지도 몰라. 또 못사는 사람은 남에게 복을 빌려 주었기 때문인지도 몰라. 그러니 좀 잘산다고 으스댈 것도 아니고, 못산다고 풀 죽을 일도 아니야.” (<빌린 복으로 잘산 이야기>, 김장성)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292025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