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대통령의 권력과 폭력 사이
- 경향신문 2016년 8월 24일 -
▲ 강진구
경향신문 논설위원
나치 집권시절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은 동일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서로 대립한다”고 했다. 폭력은 권력이 위태로워질 때 나타나며 마지막에는 권력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통찰은 국가권력이 정당성을 잃을 때 그 정당성을 보충하기 위해 폭력이 동원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아렌트의 지적이 떠오르는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 정당한 권력의 사용을 넘어 폭력 수준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최측근 실세인 우 수석은 현 정권이 가진 권력의 정당성을 결정적으로 바닥나게 만든 장본인이다. 민정수석은 검찰·경찰·국정원·국세청·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의 활동 방향을 틀어쥐고 있는 막중한 국가권력 그 자체다. 그의 판단과 명령, 행동 하나하나에 국가권력이 ‘망나니 칼’이 될 수도, 반대로 ‘정의의 칼’이 될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120억원대 주식 대박으로 진경준 검사장이 구속될 때가 공직검증 실패의 책임을 물어 우 수석을 내칠 수 있는 ‘골든타임’이었다. 하지만 ‘우병우 감싸기’로 나서면서 넥슨과의 부적절한 1300억원대 부동산거래, 홍만표 사건 브로커와의 유착 및 몰래변론, 군대간 아들 꽃보직 등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렌트는 1973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국회와 특검, 언론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을 때 “존재 자체가 범죄인 정치 스타일을 경험하고 있다”고 했다. 닉슨이 건국 아버지의 믿음을 저버리고 공화국의 군주로 행세하면서 자신은 항상 옳고 자신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국가안보를 위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모습을 ‘범죄’로 단언한 것이다. 백악관의 도청지시 의혹과 관련해 녹취 테이프 제출을 요구한 특검과 법무장관을 해임한 닉슨의 권력은 아렌트에겐 단지 ‘폭력’에 불과했던 셈이다.
박 대통령이 직권남용 혐의를 받고 있는 우 수석을 대신해 그의 비리를 쫓던 이석수 특별감찰관을 국기문란 사범으로 몰아 검찰의 수사를 받게 한 것은 정확하게 닉슨의 ‘폭력’을 연상시킨다. 이 특감이 “우 수석의 비협조로 수사가 벽에 부딪히고 있다”는 푸념을 언론에 토로한 것은 백보를 양보해도 징계대상은 모르나 국사범으로 몰아갈 사안은 아니다. 닉슨에게 녹취 테이프 전체 분량을 요구하다 해임된 콕스 특검처럼 이 특감은 ‘눈 가리고 아웅’식 조사가 아닌 제대로 된 조사를 하려다 대통령 눈 밖에 난 것일 뿐이다.
이 점에서 우 수석 문제의 본질은 ‘정권 흔들기’와 ‘식물정부 만들기’가 아니라 특감의 정당한 권력행사를 청와대가 폭력으로 억누르려 한 데 있다. 닉슨이 그랬던 것처럼 폭력에 의존하는 정부가 정당성을 만회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국가안보에 기대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22일 청와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해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내부 갈등과 혼란을 가중시키면 북한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했다. 우 수석 문제를 직접 거론하지 않았지만 대통령이 말하고 싶었던 바가 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청와대의 ‘우병우 지키기’ 속내가 국가안보가 아닌 ‘정권안보’에 있음이 드러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청와대가 24일 야당의 반대와 국회 청문보고서 채택 불발에도 불구하고 음주운전 사고 시 거짓말로 경찰 신분을 숨기고 23년간을 버텨온 이철성 후보자를 경찰청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쯤 되면 폭력집단과 마찬가지로 도덕성, 준법의식보다 1인자에 대한 충성심이 공직검증의 가장 중요한 기준임을 공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4·13 총선을 통해 여소야대가 된 국회도 박 대통령의 ‘존재 자체가 범죄인 정치 스타일’ 앞에는 속수무책인 셈이다.
문제는 폭력에 의존한 통치가 장기화될 경우 그 폐해는 단지 특정 개인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노동부가 노동법을 무시한 쉬운 해고에 이어 최근 노동자 동의 없이 임금체계를 변경할 수 있는 지침을 발표한 것 역시 국가권력이 점점 폭력화돼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실제로 노조파괴 용병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한 사측에 맞서 장기간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에게 회사의 사적 폭력보다 언제 투입될지 모를 공권력이 무서운 존재가 돼가고 있다.
하지만 다시 아렌트의 통찰을 빌리자면 도청 그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자칫 도청을 자연스러운 정치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권력이 아닌 폭력에 의한 통치가 길어질수록 시민들이 더욱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다. 시민들이 폭력에 길들여지지 않는 한 폭력은 마지막에는 권력을 파괴한다.
- 경향신문 강진구 논설위원 -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242056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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