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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안호기 - ‘한국에서 부자 되기’를 꿈꾸기 어려운 이유

irene777 2016. 9. 14. 04:03



[경향의 눈]


‘한국에서 부자 되기’를 꿈꾸기 어려운 이유


- 경향신문  2016년 8월 17일 -





▲ 안호기

경향신문 논설위원



마음이 풍요로워야 진정한 부자라고 하지만, 책 속에나 있는 말이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기준 재산이 14조원을 넘는 한국 최고 부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만큼은 못돼도 대부분 떵떵거리며 살기를 바란다. 국민은행이 발표한 ‘2016 한국 부자 보고서’는 금융자산이 10억원 이상인 부자를 21만1000명으로 추산했다. 한국 전체 가구의 1%를 약간 웃돈다. 부자의 자산 중 금융자산 비중이 절반 정도이니, 부동산을 포함한 총재산은 20억원가량 될 것이다.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에서도 부자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부친으로부터 삼성그룹을 물려받았다. 이 회장의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본격적인 상속이 이뤄지지 않았어도 7조원대 재산을 보유해 한국 부자순위 3위에 올라 있다. 4조원대 재산을 보유한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의 미성년 손주 6명은 이미 각각 800억원대 주식을 갖고 있다.


슈퍼급은 아니더라도 부자는 어떻게 재산을 모았을까. 그들이 자산을 축적한 주된 방법은 사업체 운영(38%), 부모의 증여·상속(26%), 부동산 투자(21%) 등의 순이었다. 자수성가한 사례가 일부 있지만, 종잣돈 없이 맨손으로 큰 부를 일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부자 되기가 쉽지 않음에도 한국의 부자는 2011년 이후 연평균 12%씩 꾸준히 증가했다. 부자가 늘고 있으니 누구나 부자 될 기회가 많아졌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금융자산만 200억~300억원인 거액 자산가가 연평균 14.1% 증가해 가장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다.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되기 쉽지만, 보통 사람이 부자 되기는 어렵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한국 사회의 양극화는 소득 못지않게 불균형이 심한 재산 탓이 크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15년 기준 부동산 총액은 건물 부속토지 3732조원, 건물 2561조원 등 6293조원이다. 1996년 1473조원이었던 부동산 가치는 20년 만에 327% 폭등했다. 같은 기간 근로자가구 근로소득은 연간 1958만원에서 4954만원으로 153% 늘어나는 데 그쳤다. 임금보다 부동산 가치 상승률이 두 배 이상 높다. 그러나 부동산 보유자가 재산을 불릴 기회는 두 배를 훨씬 초과한다.


예컨대 1996년 1억3400만원짜리 아파트를 물려받은 ㄱ씨와 월셋집에서 자취하는 ㄴ씨가 같은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해보자. 평균 근로소득을 적용하면 한 푼도 쓰지 않고 20년간 월급을 모아도 6억원이 채 안된다. ㄱ씨는 월급의 상당 부분을 저축하거나 집을 늘리는 데 쓸 수 있다. 재주가 좋다면 임대소득을 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산술적으로 20년 뒤 아파트 가치는 6억3000만원으로 뛰겠지만, ㄱ씨는 아파트 팔고 사기를 반복해 더 큰 재산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ㄴ씨는 월세와 전세 비용에 대출이자까지 갚느라 저축할 돈이 훨씬 적다. ㄴ씨와 같은 직장인은 월셋집에서 전셋집으로 옮기거나, 대출을 잔뜩 낀 아파트 한 채 장만했다면 다행이다. 출발할 때 아파트 한 채였던 재산 격차는 20년 뒤 아파트 몇 채로 벌어질 수 있다. 고액 과외를 받으며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ㄱ씨의 자녀는 ㄴ씨의 자녀에 비해 고액 연봉을 받는 직장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진다. 출발선이 다른 만큼 ㄴ씨 가족이 부자 될 기회는 갈수록 멀어지고, 불평등은 대를 이어 심해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ㄴ씨에게 ‘노오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낙타에게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으니 다이어트 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공정하지 않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의 특성이니 어쩔 수 없다고 방치할 수는 없다. 멀찌감치 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 임계점에 이르러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말로만 ‘꿈이 이뤄지는 사회’를 외칠 게 아니라 출발선을 비슷하게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의 부자에게는 선뜻 통 큰 기부를 하거나, 유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하기 어렵다. 국가가 나서야 한다.


멈출 줄 모르고 치솟는 부동산값을 안정화하는 게 우선이다. 한국은 10명 중 3명만 토지를 갖고 있고, 인구의 1%가 전체 토지의 55%를 소유하고 있다. 이 같은 독점 구조에서 부동산값 상승은 부익부 빈익빈만 초래한다. 과거 종합부동산세처럼 보유세를 대폭 강화하면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 조세 형평성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부동산 활성화에 목매고 있고 증세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불균형 완화와는 정반대 방향이다. 국회가 소득과 재산 불균형 개선에 힘써주기를 기대한다. 다만 20대 국회는 의원 평균 재산이 41억원인 부자 모임이라는 게 찜찜하다.



경향신문  안호기 논설위원 -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172043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