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회-생각해보기

<칼럼> 박원호 - 내 마음속의 올림픽

irene777 2016. 9. 20. 02:38



[정동칼럼]


내 마음속의 올림픽


- 경향신문  2016년 8월 30일 -





▲ 박원호

서울대 교수 (정치학)



서울올림픽을 기억할 정도의 ‘기성세대’들은 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1981년의 ‘바덴바덴’을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집합적 기억에 남아있는 올림픽이란 1988년 서울에서 벌어진 행사라기보다는 그 행사에 이르는 7년 동안의 길고 거창했던 준비 기간이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동원되고 ‘민족의 명운’이 걸린 것으로 홍보되던, ‘한강의 기적’과 ‘민족의 웅비’를 완성해줄 그 올림픽이 정작 시작되고 난 다음에는 어떤 경기들을 보고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 기억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올림픽은 우리에게 더 큰 대의에 이르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 유치를 시작한 것이 박정희였건 전두환이었건, 애초의 목적이 군부 권위주의의 정당성을 과시하는 것이었건 아니었건, 확실한 것은 세계를 향해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의식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금메달을 그렇게 갈구했던 것은 금메달만이 잠실운동장과 올림픽대로의 자랑스러운 웅장함-30년 전의 기준으로-에 걸맞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며, 올림픽은 전 세계가 그런 포효를 들으러 오는 중요한 행사일 수밖에 없었다. 올림픽은 우리에게 그런 의미였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Citius, Altius, Fortius)라는 올림픽 구호는 약육강식의 국제질서에서 약소국으로서 우리의 나아갈 바를 알려주는 슬로건이나 다름없었다. 냉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미국과 소련의 국가 경쟁이 그러하였고, 그 틈바구니에서 “저들보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어디론가 질주해야 우리가 생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 2등은 무의미하다는 것,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것, 강한 것이 아름다우며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해 준다는 것이 아마도 기성세대가 올림픽으로부터 배운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거의 30년이란 세월이 흘러 올림픽을 다시 본다. 나는 문득 응원을 하는 나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나 대중의 여론이 내가 기억하는 올림픽의 기억과는 약간은 달라진 것을 느낀다. 이를테면, 여자 배구팀이 4강에 탈락한 것이 아쉬웠지만, 화면으로도 전해지는, 진심으로 서로를 아끼고 격려하고 북돋우는 선수들의 팀워크는 금메달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하면 된다”를 되뇌었던 펜싱의 박상영 선수나, 승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패전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태권도의 이대훈 선수나, 판정 논란을 딛고 일어선 레슬링의 김현우 선수나, 중요한 것은 메달의 색깔이 아니라 그곳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역설적으로, 역도에서 기대했던 금메달을 따지 못하자 자리를 떠나버린 북한 임원이나 “금메달로 지도자에게 보답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북한 선수에게서 아직도 건재한 스포츠 국가주의를 본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 30년 동안 한 뼘이라도 바뀐 것이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제 선수들이 “국민들이 뭐라고 할까?”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온 것이 아닌가 희망한다. 박인비 선수나 양궁 선수단이 설령 금메달을 따지 못했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똑같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올림픽같이 철저하게 국가주의와 상업주의가 결합한 행사는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하는 올림픽 정신과는 반대로 철저한 프로페셔널들의 세계일 것이다. 2등은 용납되지 않으며 이기지 않으면 도태되고, 강한 것은 아름다우며, 결과로서 말하는 세계. 그러나 스포츠가 위대한 것은 비록 수백억원의 연봉을 받는 선수조차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온몸을 내던져 무의미한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하는 순간을 일렁이는 불꽃처럼 보여줄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타인들이 아니라 자기의 한계보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무엇인가를 보여주려는 찰나의 순간, 다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앞에 있기 때문에 나의 온전한 존재를 자신도 모르게 내던지는 그 순간을 우리는 비로소 아마추어리즘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지난 30년 동안 적어도 스포츠 영역에서 우리를 속박하던 국가주의와 집단주의,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강박증과 성과주의에 대한 숭배에서 우리가 한 발짝이라도 움직였다면, 그리고 스포츠가 현실에 대한 희미한 은유라도 된다면, 그곳에서 우리는 조그마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명의 영웅-‘인재’-이 아니라 수백명의 아마추어들이, 집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혹은 스스로를 극복하면서, 때로는 서로 부딪히고 때로는 서로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공동체를 상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302056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