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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남구 - 재난 유토피아, 그리고 국가

irene777 2016. 9. 28. 17:07



[아침 햇발]


재난 유토피아, 그리고 국가


- 한겨레신문  2016년 98일 -





▲ 정남구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2007년 12월7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유조선이 해상 크레인과 충돌해 탱크에 있던 기름이 바다를 뒤덮었다. 기름에 전 바닷가 바위와 모래사장을 청소하기 위해 연인원 123만명의 자원봉사자가 이곳을 찾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2014년 4월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는 어부들이, 잠수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인명 구조와 시신 수습에 나섰다. 지역 주민, 자원봉사자들의 지원 행렬도 이어졌다. 작가 리베카 솔닛이 ‘재난 유토피아’라고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지 꼭 2년이 되던 올해 4월16일 새벽 1시25분,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규모는 M7.3, 진도는 5~7이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내가 도쿄에서 겪은 지진은 진도가 5였다. 구마모토의 주민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하고 어리둥절할 정도로 처음 겪는 엄청난 지진이었다고 했다. 1만3천여가구가 사는 마시키마치에서만 전체의 5분의 1에 가까운 2714채의 집이 전파됐다.


지난주 일본 포린 프레스센터 초청으로 피해 현장을 돌아봤다. 도로와 교량엔 피해 흔적이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털썩 주저앉은 채 아직 철거하지 못한 집, 구마모토성의 무너진 성벽, 산사태 흔적만이 지진이 있었음을 알려줬다. 동일본 대지진 때에 견줘 복구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자위대가 다음날 바로 들어와 구조와 복구에 나섰다고 한다. 미나미아소무라 의회에서 일하는 이치하라 히데시(61)는 “이곳에 있던 도카이대학 농학부 학생 800여명을 사흘 만에 고향의 가족 품으로 모두 돌려보냈다”고 했다.


지진으로 인한 규슈의 경제적 피해는 26조~50조원가량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절망은 보이지 않았다. 무너진 건물은 정부가 무상으로 철거해주고, 최대 20억엔까지 피해는 4분의 3을 지원해준다고 한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경제회복 지원이었다. 규슈는 관광이 주요 산업 가운데 하나다. 관광산업 타격은 심각했다. ‘골든 위크’(5월 초의 긴 황금연휴)를 앞두고 지진이 일어나 예약이 대부분 취소됐다. 일본 정부는 내외국인 관광객의 숙박비 할인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을 편성했다. 7월부터 9월까지는 70%를 할인하고, 2단계로 10월부터 12월까지는 50% 할인을 지원한다. 벳푸 시장은 “외국인 관광객은 돌아오는 속도가 느리지만, 월 관광객이 지난해의 95% 수준을 넘었다”고 했다.


지진으로 집을 잃은 이치하라 가족 5명은 건강 테마파크인 아소팜랜드의 돔하우스에서 지내고 있다. 평소 하루 숙박비가 1인당 15만원가량 하는 곳이다. 테마파크 관광객이 줄어든 참에 정부가 이 시설 일부를 이재민 숙소로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운영회사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부는 평소 숙박비의 절반가량을 낸다. 이치하라는 곧 가설주택으로 옮긴다. 5명이 살기에 좁고 불편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큰 지진에 가족 모두가 아무 부상 없이 무사하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더 바랄 게 없다.”


리베카 솔닛은 우리 인간이 이타주의와 연대의 정신으로 재난 가운데서 지옥을 통과해 낙원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서, 우리는 고난을 견뎌내고 희망을 갖는 것일 게다. 하지만 재난 유토피아가 무책임하고 무능한 국가의 뒷모습이어선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진이 일어난 지 26분 만에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규슈엔 이렇다 할 재난 유토피아가 없었다.



- 한겨레신문  정남구 논설위원 -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7605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