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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권혁철 - 고엽제와 사드의 공통점

irene777 2016. 9. 28. 17:28



[편집국에서]


고엽제와 사드의 공통점


- 한겨레신문  2016년 8월 28일 -





▲ 권혁철

한겨레신문  지역 에디터



<한겨레> 송인걸·최예린 기자는 1967년 휴전선에서 광범위한 고엽제 살포가 있었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고 지난 17일 보도했다. 정부가 인정해온 지역 이외에서도 고엽제 살포가 있었던 사실을 법원이 처음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많은 사람들이 고엽제 환자 하면 베트남 파병 군인을 떠올린다. 실제 정부가 인정한 고엽제 환자는 대부분 베트남 파병 군인들이다.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고엽제 환자를 보면, 베트남 파병자는 9만9936명인 데 견줘 국내 고엽제 환자는 1873명으로 베트남 파병자의 1.87%에 불과하다. 베트남 복무가 확인되고 고엽제 후유증세가 나타나면 베트남 고엽제 환자로 등록할 수 있다. 이와 달리 군 당국이 고엽제 살포를 인정한 특정 지역·기간에 군복무한 경우에만 국내 고엽제 환자 등록을 받아준다.


1960~70년대 휴전선에 근무하던 군인들은 맹독성 제초제를 마스크 착용 등 최소한의 안전지침도 없이 맨손으로 뿌렸다. 67년 무렵에만 국군 10개 사단 장병 약 15만명이 고엽제에 노출됐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왜 60년대 후반부터 휴전선에서 고엽제를 집중 살포해야 했을까. 지면 제약 때문에 기사에 담지 못했지만 송인걸·최예린 기자가 취재한 내용을 보면, 고엽제 피해자들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한·미 군 당국은 북한의 대남침투가 집중되자 베트남에 파병한 국군 부대 철군 여론을 잠재우고 대간첩작전의 효율을 높이려고 휴전선에 목책 대신 철책을 설치했다. 전방 관측하고 사격할 때 앞을 가리는 풀과 나무를 없애는 불모지 작업을 강화하면서 베트남에서 들여온 고엽제를 사용했다.”


68년 남북 군대는 군사분계선에서 대포까지 동원해 이틀에 한번꼴로 교전을 벌였다. 구체적으로 68년에는 남쪽으로 침투하던 북한군 321명이 사망하고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181건의 남북충돌이 벌어졌다. 이 결과 국군 145명, 미군 18명, 민간인 35명 등 198명이 숨지고, 국군 240명, 미군 54명, 민간인 16명 등 310명이 다쳤다.


당시 한반도의 군사 위기는 베트남전쟁과도 관련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을 하면서 만약 베트남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하면 그 여파가 한반도에도 미칠 것이라며 “베트남은 우리의 제2전선”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북한도 대남 무력도발을 강화해 베트남에 집중된 미국의 군사력을 분산시키려고 했다. 67년 이후 휴전선 고엽제 대량 살포는 이런 국내외 정세를 배경으로 이뤄졌다.


남북관계는 70년대 들어 거짓말처럼 대화 국면으로 바뀐다.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 울진·삼척 침투 등 북한의 대남작전이 계속 실패한데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 등 동서 냉전의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다. 특히 1972년 2월 당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남북 직접대화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공교롭게도 정부가 인정한 국내 고엽제 피해 기간은 닉슨 방중 직전인 72년 1월까지다. 휴전선 고엽제 문제에는 국제정세, 남북관계, 국내문제가 얽혀 있다.


고엽제처럼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역시 국제정세, 남북관계, 국내정치 세 차원의 관계가 얽혀 상호작용을 한다. 요즘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경북 김천과 성주 주민들은 “정부는 사드가 안전하다고 하지만 10년, 20년 지나서 고엽제처럼 그런 일이 생기면 누가 책임질 거냐”고 한다. 똑똑한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도 고엽제 3차 방정식을 제대로 못 풀었는데,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드 3차 방정식을 풀기를 기대하긴 어려울 듯하다.



- 한겨레신문  권혁철 지역 에디터 -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87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