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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보협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irene777 2016. 9. 28. 18:05



<편집국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한겨레신문  2016년 9월 4일 -





▲ 김보협

한겨레신문  디지털 에디터



아버지의 별명은 ‘콜렉터’였다. 우표와 음반을 모으셨다. 정보가 귀하던 시절, 신문과 잡지 등을 오려 주제별로 스크랩북을 만들기도 했다. 그 취미는 디지털 세상을 만나 확장됐다. 포털에 블로그를 열고 ‘콜렉터’라는 아이디로 활동하셨다. 좋은 글과 사진, 음악 등을 큰 품 들이지 않고 무한정 저장할 수 있다는 점에 끌리셨던 것 같다. 컴퓨터와 프로그램에 대한 지식은, 노트북을 타자기와 팩스의 결합상품 정도로 쓰던 기자 아들 이상이었다. 그럴 만한 힘이 있을 때 얘기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은 요양병원에 계신다. 최근 몇 년, 본가에서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았는데 거동이 더 불편해지자 시설로 옮기신 거다. 못난 자식들은 돌봐드릴 형편이 되지 않고 어머니도 힘에 부치자 지난해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이었다. 미리 준비하고 대처했더라면 더 편하고 쾌적한 곳에 모실 수 있었을 텐데, 동네의 작은 병원에 딸린 요양병원에 들를 때마다 맘이 편치 않다. 세상의 온갖 문제에 참견하고 아는 척하면서 정작 요양병원과 요양원의 차이도 몰랐고, 괜찮은 곳에 모시려면 미리 신청을 하고 몇 년씩 기다려야 한다는 이치도 몰랐다. 닥쳐서야 알게 됐고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요양병원과 요양원의 결정적 차이는 의료진의 상주 여부다. 요양병원의 경우 의사가 정기적인 회진을 하지만 완쾌 혹은 재활에 주목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아버지 말씀이 재밌다. “나도 여기 의사는 할 수 있겠다. 화장실 못 가면 변비약 주고 설사하면 지사제 주고….” 병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 병원은 노인들의 낙상사고를 우려해 주로 침대에 있기를 권하고 쉴 공간도 마땅치 않아 짧은 복도를 오가는 게 전부이다 보니 외려 운동기능이 퇴화하는 것 같다는 게 아버지의 불만이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기 마련인데 이쪽 세계는 아니다. 보살핌이 필요한 어르신들은 점점 늘어날 테고 각 가정에서 온전히 책임지기는 힘들어졌다. 그런데 왜 편안한 노후를 맞을 시설은 턱없이 부족할까. 사람들의 평가가 좋은 요양원은 대체로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운영하거나 종교기관에 운영을 맡긴 곳이다. 수익에 연연하지 않고 보살핌, 돌봄이라는 요양원의 본원적 목적에 충실한 덕분일 것이다. 공공 부문이 시장원리 지배를 받는 민간 부문에 비해 낫다고 평가받는 요양원이나 어린이집, 유치원 등은 보살핌과 돌봄이라는 열쇳말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그런 시설과 기관을 더 많이 만들면 되지 않을까. 평생을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았는데 평안한 노후를 위해서까지 긴 줄을 서야 할까.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일 대부분을 대체하더라도 세심하게 배려하고 돌보는 일을 사람보다 더 잘할 것 같지는 않다.


병원 바깥세상과 이어진 끈이 공용 텔레비전 하나밖에 없자, 아버지는 다시 컴퓨터를 찾으셨다. 노환 탓에 손이 많이 떨리는데도 마우스를 쥐고 한동안 잊어버렸던 기능들을 다시 익히고 계신다. 화면을 키우고 줄이는 방법, 받은 메일을 전달하는 방법, 블록을 지정하고 복사해서 당신 블로그로 옮기는 방법 등을 알려드렸다. 젊은 사람들은 몇 분이면 익힐 것을 어린아이가 글자를 배우는 것만큼 힘들어하신다. 천천히 시범을 보이고, 종이에 순서대로 적어 드렸다. 직접 실습까지 하고서도 다음에 가면 “또 잊어버렸다”며 멋쩍어하신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한석규가 아버지 신구에게 비디오 작동법 등 이것저것 알려드리다 짜증을 내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의 부재가 두려웠을 것이다. 언젠가 닥칠 아버지의 부재가 난 벌써부터 두렵다. 우리에게 몇 번의 명절이 남았을까. 올 추석 때 집에 오시면 밀린 효도를 하고 아버지 곁에서 자야겠다.



- 한겨레신문  김보협 디지털 에디터 -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98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