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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병철 - 루비콘 강 건넌 한반도 비핵화

irene777 2016. 10. 16. 01:13



[시론]


루비콘 강 건넌 한반도 비핵화


- 경향신문  2016년 9월 12일 -





▲ 이병철 

평화협력원 핵비확산센터 소장



박근혜 대통령이 이겼다. 사드 배치 건 말이다. 미국의 한반도 내 사드 배치 광풍이 지난 9일 북한의 5차 핵실험 폭풍을 만나 자연스럽게 소멸됐다. 사실 적지 않은 북한 문제 전문가들과 안보 분석가들은 북한이 5차 핵실험을 할 경우 사드 논란은 자연히 ‘정리’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견을 해오긴 했지만, 박 대통령으로서는 뜻밖의 횡재를 한 셈이다. 동기야 어찌됐든 북한 김정은이 박 대통령의 ‘엑스맨’ 역할을 했다.


이번 핵실험으로 북핵 판도라 상자가 기어코 열리고 말았다는 게 중론이다. 보도에 따르면 폭발력은 10㏏으로 역대 최대치이자, 2006년 1차 핵실험 폭발력의 10배 수준이다. 김정은의 북한이 더욱 위험한 국가가 될 것이라는 진단이 결코 과장이 아니란 게 입증된 셈이다. 북한이 자발적으로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조차 접어야 할 때가 됐다. 이번 5차 핵실험으로 북한이 앞으로 어디로 가려 하는지가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집권 5년 차에 들어선 김정은의 북한이 가고자 하는 길은 현재 지니고 있는 핵무기 숫자를 늘림과 동시에 이를 중장거리 미사일에 성공적으로 탑재하는 것이다. 북한의 ‘파키스탄화’이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핵실험에 대항할 목적으로 1998년 5월 핵실험을 연거푸 여섯 차례나 실시, 이제는 보유한 핵무기가 100기 이상에 이른다는 게 정설이다. 이는 적대국으로부터 선제공격을 받더라도 2차, 3차 반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확고한 핵방어 내지 억제능력을 갖춘 셈이다. 파키스탄핵무기 박사의 도움을 받은 북한이 파키스탄의 핵무기 경로를 밟으려 할 것이라는 추론은 그래서 어렵지 않다.


현재 북한은 상당 분량의 무기급 플루토늄과 고농축 우라늄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100기 이상의 핵무기를 확보하려 할 것이다. 동시에, 미사일 성능을 고도화하려고 노력 중이다. 일례로, 해저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 것이 최근 입증됐다. ‘통제 불능의 김정은’이 이러한 대량살상무기 기술들을 최단 시간에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속도전’을 외치고 있다. 그래야 미국의 선제공격이 있더라도 이에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이라도 확보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네가 양보하지 않으면 같이 죽자”는 식의 비합리성을 매우 합리적으로 이용(rationality of irrationality)하는 군사 도박(gamble)인 셈이다.


난감해진 측은 내세울 만한 남북회담도 없이 임기 중 북한 핵실험을 두 차례나 허용한 박근혜 정부다. 떠나는 오바마 행정부를 상대로 밀도 깊은 전략적 의견을 교환하기가 어려워졌으며, 일본과의 대북 공조 역시 녹록지 않다. ‘평화의 소녀상’ 처리에 미숙함을 드러낸 정부로서는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는 아베의 입지만 자칫 강화시켜줄 수 있다는 외교적 판단도 감안할 것이다. 중국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것이 여러 면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급냉각된 한·중관계를 녹이는 일이 고차원 방정식 문제를 푸는 것만큼 힘들게 됐다. 따라서 외교안보 정책 엘리트들의 관성적 인식을 고려해 볼 때 당분간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북 제재 강화와 국제공조를 외치는 것뿐이다.


국내에서는 5차 핵실험으로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점차 세(勢)를 넓혀갈 것이다. 이와 관련, 정부는 이제라도 1992년 1월 남북한 간에 체결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북핵 실험 등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폐기 선언을 해야 한다. 핵을 ‘1차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원칙’(no first use)을 사실상 포기하기로 한 미국으로서는 북핵 고도화 움직임뿐만 아니라 국내 핵무장 목소리도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간주할 것이다. 이래저래 한반도 비핵화는 바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새겨 넣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됐다. 한반도 상공에 북한 핵무기 깃발이 펄럭이는, 실로 엄중한 시기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12211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