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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의겸 - 대통령의 유사가족

irene777 2015. 1. 15. 16:38



대통령의 유사가족


김의겸 디지털부문 기자


- 한겨레신문  2015년 1월 13일 -





▲ 김의겸

한겨레신문 디지털부문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새해 기자회견에서 김기춘 비서실장과 비서 3인방을 감싸고도는 걸 지켜보면서 “아! 한 가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한 공간에 모여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마침내 가족처럼 끈끈해진 ‘유사가족’ 말이다. 대통령의 남동생 박지만씨가 표현한 “피보다 진한 물도 있더라”란 이 경우에 적용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따지고 보면 박 대통령이 아버지를 잃은 건 27살 때가 아니다. 9살 무렵 이미 아버지는 감당하기 버거운 신화적 존재로 등극해버렸다. 숨막히는 압도감으로 다가오는 아버지, 그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한 점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극도의 자기절제.... 그 팽팽한 긴장감이 어린 근혜를 단련시키고 성장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철 소녀’라 한들 마음이 무너질 때 말없이 넓은 등을 내밀어주는 아버지가 왜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최태민 목사가 인성 형성기에 박근혜의 몸과 영혼을 완전히 통제”(버시바우 미국 대사의 보고서)한 게 맞다면 그건 아마도 최태민이 ‘보통의 아버지’를 대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회견 내내 얼굴이 굳어 있는 김기춘 실장을 보면서 최태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공통점이 있다. 육영수씨 피격 사건을 계기로 박근혜의 운명에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최태민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박근혜를 위로했고, 검사 김기춘은 저격범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내 어머니의 영혼을 달래줬다. 게다가 김기춘은 아버지의 정신이 법제화된 유신헌법을 만든 핵심이다. 아들이 1년 넘게 사경을 헤매는데도 ‘주군의 딸’을 지켜주고 있으니 박 대통령으로서는 그 헌신에 ‘부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보기 드물게 사심이 없는 분”이라는 말은 그런 한없는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답례인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에게 동생들은 없는 거나 진배없다. 아니 없느니만 못할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남매가 철의 규율로 뭉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려면 자신이 아버지를 숭배했듯이 동생들도 자신을 추종해줘야 한다. 하지만 동생들은 ‘전선’을 이탈하고 말았다. 이날 회견에서 남동생을 겨냥해 “바보 같은 짓에 말려들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된다”고 사납게 쏘아붙인 건 평소 감정도 묻어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동생 근령이 최근 인터뷰에서 “형님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뤄 자매 사이는 여전해 보인다.


이에 반해 회견에서 드러난 3인방에 대한 애정과 신뢰는 부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혈육에 가까웠다. 20년 가까이 한자리에서 자신의 눈빛마저 섬세하게 챙겨준 이들이야말로 진짜 동생들인 셈이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3인방 처리에 대해 “팔다리는 자를 수 있어도 오장육부는 들어낼 수 없는 법”이라고 얘기했다. 오싹하도록 정확한 비유구나 싶었다.


그러니 박 대통령이 “청와대 조직을 새롭게 개편하겠다”고 밝혔지만 그 대상에 유사가족은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인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우리는 2년여 전 선거에서 박 대통령만 뽑은 게 아니라 그의 유사가족도 함께 선출한 것으로 여겨야 할까? 마치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부인 김윤옥, 아들 이시형도 청와대에 보냈듯이 말이다.


오래전 텔레비전 드라마에 <불량가족>이란 게 있었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9살 나림의 기억을 회복시키기 위해 유사가족이 구성됐는데, 이를 통해 그 구성원들이 모두 자기 위안과 치유의 계기를 얻는다는 내용이었다. 청와대의 유사가족도 위안과 치유는 받을지 모르지만, 이를 시청하는 국민들 눈에는 진짜 불량가족으로 비칠 것이다.



- 한겨레신문  김의겸 디지털부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