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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대엽 - ‘체온이 담긴 정치’ 원년을 그리며

irene777 2016. 1. 8. 05:45



[정동칼럼]


‘체온이 담긴 정치’ 원년을 그리며


- 경향신문  2015년 12월 31일 -





▲ 조대엽

고려대 교수 (사회학)



시간은 변함없이 이어서 흐르지만 그 흐름을 접어 다시 한 해를 시작하는 약속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총선이 있고 내년에는 대선이 있으니 병신년 새해는 아무래도 정치적 격동의 서막이 되는 해가 되기 쉽다. 어느 때보다 우리 정치판을 바로 보고 판단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싶다.


교수신문은 작년 한 해를 특징 짓는 사자성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를 선정했다.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의 실정으로 나라가 온통 암흑처럼 어지럽다고 풀었다. 메르스의 공포, 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 시위 과잉진압, 여당 원내대표를 대통령이 ‘찍어내는’ 이른바 배신의 정치 파동, 쟁점법안 처리를 위한 청와대의 노골적인 국회의장 압박, 납득할 수 없는 위안부 문제 타결 등 혼용무도한 정치가 아닌 게 없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나라가 들끓을 때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해외에서 한국에 대한 평판을 좌우하는 가장 큰 리스크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라고 했다. 이 혼용무도의 정치 한복판에 대통령의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이 있다. 한 블로거는 박근혜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을 “딴 데서 노닐다가 얼떨결에 들어와 전혀 주제파악도 안된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거나, 분명히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일인데도 마치 딴 사람 일인 양 말하거나, 전혀 앞뒤가 맞지않는 말을 늘어놓아서 듣는 사람이 더 헷갈리게 만드는 화법”이라고 정리했다.


유체이탈형 리더십의 첫 번째 원천은 국민의 고단한 일상의 삶에 대한 고도의 ‘무관심’이다. 두 번째는 국민의 삶을 보다 나은 상태로 개선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지 못한 ‘무능’이다. 세 번째는 대통령 자신이 곧 국가와 민족이기 때문에 국민은 자신의 의지와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병적인 ‘독단’이다.


대통령의 무관심과 무능과 독단은 뒤틀린 화법만이 아니라 차가운 권력과 싸늘한 리더십의 정치를 낳았다. 꿈을 잃은 시대, 희망 없는 시대라는 통념이 만연해 있다. 청년층은 삼포, 오포, 칠포, 헬조선을 외치고, 장년층은 자녀교육, 고용불안, 조기은퇴로 지쳤다. 노년층은 심각한 고립감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모든 근본적인 것이 흔들리는 우리 시대의 진앙에 차가운 권력, 싸늘한 리더십이 있다. 국민들은 고단한 삶을 어루만지는 체온이 있는 정치, 삶을 보듬는 리더십에 목말라 있다.


올 4월에는 국회의원 총선이 있다. 차갑고 싸늘한 권력정치 탓에 황폐해진 우리 사회를 녹일 수 있는 정치를 선택하는 숙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치의 체온이 시민의 삶에서 느껴지고 또 정치인이 언제나 시민들의 체온을 느끼는 그런 정치가 절실하다. 체온이 있는 정치, 삶을 보듬는 리더십은 정치가 리스크가 되어버린 한국의 선거정치 질서에서 사실상 선택되기 어렵다. 체온이 있는 정치는 무엇보다 정치와 시민생활이 밀착된 데서 나온다. 정치와 민주주의와 국가가 시민의 삶 속에 들어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거정치에는 체온의 정치를 가로막는 장벽이 두껍다. 철면피한 거짓의 구호와 냉전 이념과 지역주의가 그것이다. ‘혁신’과는 도대체 털끝 하나 닿지 않는 여당이 내건 ‘혁신작열’류의 헛구호와 혁신의 이름으로 흩어진 야권의 혼돈을 꿰뚫어 진짜 혁신, 시민의 삶을 보듬는 혁신을 찾아야 한다. 종북과 반북으로 국민을 가르는 냉전이념의 껍데기를 깨고 생활을 보듬는 진보, 생활 속으로 들어간 보수를 찾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더 이상 특정 지역을 지역주의 정치의 수인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을 지역주의 정치의 늪에서 건져야 한다. 야당의 찢어진 세력들은 말로는 혁신과 새정치를 외치며 ‘호남’을 향해 질주했다. 언제나 앞선 민주주의를 열었던 숭고한 호남의 정신을 권력에 눈먼 지역정치의 철창에 다시 가두는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호남을 넘는 호남’만이 호남인과 한국 정치를 살리는 역사적 책무다. ‘영남을 넘는 영남’만이 영남인과 한국 정치 진화의 필연적 과제다.


4월의 총선은 거짓된 구호와 냉전의 이념과 지역의 수인을 만드는 정치를 벗어던진 후 체온이 있는 정치, 삶을 보듬는 리더십을 가려내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야당이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어 화제다. ‘더불어’는 민주당의 당명에만 붙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모든 정당과 정파가 추구하는 가치로 되새길 만하다. 체온이 있는 정치는 시민의 삶을 보듬고 모든 시민이 ‘더불어’ 사는 삶을 만드는 정치다. 이념을 넘어, 지역을 넘어, 모든 계층, 모든 세대, 모든 성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체온이 있는 정치’가 선택되는 새해를 그려본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2311953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