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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상희 - 타락하는 국가의 예후 ‘전해라 신드롬’

irene777 2016. 1. 8. 06:03



[정동칼럼]


타락하는 국가의 예후 ‘전해라 신드롬’


- 경향신문  2016년 1월 3일 -





▲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올겨울 최고의 유행어로 새해 덕담에까지 진출한 “전해라”는 실상 우리 시대의 아픈 징후이다. 이 말에는 말하는 사람과 그의 메시지만 무성할 뿐, 정작 들어야 할 사람과 그 말의 전달자는 익명 처리된다. 그래서 이 말은 무의미를 넘어 언어유희로 전락한다. 말하려는 메시지는 있으되 그것을 전할 사람이 없기에 결국 애초의 메시지까지도 사라져버린다. 오직 남은 것은 직접 말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만큼 어쩌지 못하는 이 현실의 압박이며, 그 앞에 선 딸깍발이 양반의 허세뿐이다.


말하기를 잊은 사람들, 그럼에도 말하기의 본능을 이기지 못해 말을 꺼내야 하는 사람들, “전해라” 신드롬은 이들의 고통을 담아낸다. 1%를 위한 99%의 구도가 철칙인 세상에서 우리가 대놓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은 없다. 우리를 위해 말해주는 사람도 없다. 있지도 오지도 않을 복을 두고 우리는 그저 “새해 복 많이 받으라 전해라”며 한 해를 넘기고 또 맞을 뿐이다.


이 신드롬의 근원은 불통의 현실이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내건 대선공약이 졸지에 우리의 삶을 옥죄는 친재벌정책으로 뒤바뀌어도, 수많은 권력형 비리들이 제대로 된 단죄도 없이 온 누리를 헤집고 다녀도, “가만히 있어라”가 결코 구조의 약속이 아니었다 하여도, 우리의 목소리는 아무런 힘이 없다. 저 독선의 정부는 악을 보고도 처벌하지 않고, 부정을 적발하고도 은닉하며, 부당함을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다. 말해봐야 공허했고 비판해봐야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의 말을 대변해야 할 야당은 야당대로 무능하거나 허약하거나 혹은 해산되었다. 노랫말 속의 저승사자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듯이, 우리들은 이 철벽 혹은 철밥통의 권력 앞에서 말이 소용없는 무의미의 시대만을 살아야 할 따름이다.


“전해라”는 타락해가는 국가의 예후이다. 우리 헌법이 말하는 민주공화국이란 권력이 제도화되고 법과 국민의 의사에 의해 통제되는 국가이다. 국민의 억울하고 답답함은 법이 풀어주고 정치가 해소한다. 국민이 말을 하면 법이 들어주고 정치인이 이를 전달한다. 하지만 이 정권에서의 권력은 대통령과 그 추종자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사유물이 되어 버렸다. 옳고 그름의 유일한 판단기준은 대통령의 의중이며, 정치력의 결정요소는 대통령과의 친소관계 여하임은 작금의 국정교과서 논란이나 여당 내부에 존재하는 이런저런 “박”들의 권력다툼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말해봐야 불통이고, 그 말을 되받아 줄 정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법치의 실종이며 민주의 실패다. 근대의 문명이 터 잡았던 국가 그 자체가 사유화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지난 세기의 수많은 논의들처럼 국가를 상상적 공동체로 치부하며 시장이나 시민사회로 우회하기에 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너무도 커 버렸다. 막강한 권력의 국가 앞에서 어렵사리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우리의 말을 전하기에는 시장도 시민사회도 터무니없이 왜소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절대반지는 시장이 아니라 그 시장을 만들고 주도하는 국가다. 생활정치를 말하며 시민사회론을 내세우지만 우리의 삶은 이미 국가가 지배한다. 그리고 이렇게 커 버린 국가는 우리들과 우리 자손들의 자유와 안전과 행복을 영구히 지켜주리라 믿었던 우리를 배반한다.


하지만 세상은 이보다 더 가혹하다.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 피츠제럴드의 말처럼 “우리는 어떤 것에 희망이 없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럼에도 이를 변화시키기로 마음 먹어야”하기 때문이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도 삶은 계속되기에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희망을 만들어내야 한다.


민주주의는 본시 사유화된 권력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힘으로 구성된다. 헌법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단언한 것은 이를 말한다. 정치가 권력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런 민중들이 스스로를 주권적 주체로 자각할 때이다. 희망 없는 이 엄한 세상에서 새해 새 출발은 이런 자각에 터 잡아야 한다. 때마침 우리에게는 오는 4월의 총선이 있다. 또 조금 멀리 내년의 대선도 있다. “전해라”라는 말 뒤에 몸을 숨기지 않아도,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직접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한번 외쳐본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 전해라.”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0320385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