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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강남순 -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것

irene777 2016. 4. 16. 03:24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것


- 경향신문  2016년 4월 15일 -





▲ 강남순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미셸 푸코에 따르면 국가가 지닌 통치권력은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력이다. 국가는 국가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거나 또는 죽게 하는 권력인 생명권력(biopower)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 4월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어떻게 국가의 통치권 아래 살고 있는 생명이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오히려 ‘방치에 의한 죽임’을 당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가 지닌 생명권력이 생명을 보호하는 ‘생명정치(biopolitics)’가 아니라 그 생명을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하거나 죽이는 ‘죽음정치(thanatopolitics)’로 행사된 사건이다. 죽음정치는 여전히 도처에서 작동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제2, 제3의 세월호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세월호 참사를 망각하지 말고 보다 분명하게 의도적으로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정작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을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은 어떠한 기능을 지니는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두 가지 기억, 즉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기억’의 차원이 있다. 또 그 기억이 우리 사회에서 변혁적 힘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위 ‘기억의 정치학(politics of memory)’이 들어서는 지점이다.


기억의 정치학은 역사 속에서 이중적 기능, 즉 부정적 또는 긍정적 기능을 행사해 왔다. 기억의 정치학은 국가나 특정 집단들이 지닌 권력을 확장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쓰여지곤 한다. 이럴 때 특정한 사건들에 대한 기억들은 역사에서 제거되고, 조작되고, 또는 왜곡된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기억의 정치학은 개인적이고 집단적 차원에서 모든 이들의 생명 존중과 정의를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변혁적 원동력을 제공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가 유의미한 역사적 사건이 되게 하기 위해, 이러한 긍정적인 의미의 ‘기억의 정치학’을 지속해서 재구성하고 확산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변혁적인 기억의 정치학이 구성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에 대해 성찰해야 할 것이다.


첫째, ‘낭만화된 기억’을 넘어서야 한다. 낭만화된 기억의 위험성은 세월호 참사가 지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함의들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로만 이해한다. 광화문의 유가족을 바라보며 또는 세월호 ‘기억의 숲’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지만, 그 눈물이 변혁의 힘으로 연계되는 ‘연대와 책임의식’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는 것이다. 낭만화된 기억의 한계이며 함정이기도 하다.


둘째, 세월호 참사의 기억은 ‘정치화된 기억’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정치화된 기억이란 특정 정당과 연계된 의미가 아니다. 2014년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일회적인 것이거나 사적이고 개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사건이며 정치적 사건이라는 인식을 말한다. 이렇게 정치화된 기억은 구체적인 우리의 개인적 일상생활이 얼마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보게 한다. 그래서 책임적 시민으로서의 의식을 더욱 분명히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책임적 시민으로서의 의식을 확고히 할 때, 쉽사리 허위적인 정치적 공약, 퍼포먼스, 또는 프로파간다에 조정당하지 않는다.


셋째, ‘죽음의 정치’가 아닌 ‘생명의 정치’를 확장하는 변혁에의 책임과 열정을 지니는 기억이 되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국가권력이 모든 생명을 보호하고 그 삶의 질을 확장하는 진정한 의미의 ‘생명정치’를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분명한 인식을 우리에게 각인시키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세월호에 ‘안산’이 아니라 ‘강남’의 아이들이 있었다면, 평범한 직업을 가진 서민 부모들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부와 권력을 지닌 소위 특권층 부모들을 둔 아이들이 탔었다면, 304명은 전원 구조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또는 필리핀과 같은 제3세계 시민이 아니라 미국 시민이 그 세월호 희생자 중에 있었다면, 세월호 침몰 후 7시간이나 잠적한 대통령의 행방은 지금처럼 2년이 지나도록 국민이 전혀 모른 채 남겨져 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가 단지 ‘운이 없는 교통사고’나 사적이고 개인적인 사건이 아닌 이유이다. 세월호 안에 있었던 사람들의 사회적 계층 그리고 그들의 국적 등 다층적인 사회정치적 요소들이 보이지 않게 그러나 강력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 계층만의 생명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보호하는 ‘생명정치’를 확장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세월호 참사를 진정하게 기억하기란, 권력 유지와 확장에만 관심이 있고 평범한 시민들의 생명을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방치하는 ‘죽음정치’에 대해 예리하게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렇게 될 때 투표하는 방식, 신문이나 방송을 선택하는 방식, 사회적 이슈를 보고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세월호 참사가 많은 이들에게 ‘정치화된 기억’의 의미를 지니게 될 때,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 변화의 씨앗으로서 유의미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살아남은 자들로서 우리의 지속적인 과제이다. 특정한 권력층의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정치를 하는 국가를 만들어가기 위한 지속적이고 끈기있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우리의 책임적 과제인 것이다.


나는 ‘시간이 약’이라든지 ‘터널에 끝이 있듯이 슬픔에도 끝이 있다’든지 하는 말들을 경계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처구니없는 참사로 잃은 이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은 달력 속의 시간을 통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터널처럼 분명한 ‘끝’으로 매듭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슬픔은 살아남은 자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응어리다. 다만, 그 죽어간 이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그 슬픔의 공간들을 책임의 공간으로 전이시켜야 하는 과제와 씨름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슬픔을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어쩌면 격려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잔인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제 ‘돌아갈 수 있는 일상’이란 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슬픔 ‘없이’가 아니라, 슬픔에도 ‘불구하고’ 죽은 이들의 삶까지 어깨에 짊어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치열하게 내딛는 삶을 홀로 그리고 함께 만들어내고 찾아 나가야 할 뿐이다. ‘죽음정치’를 넘어서서 사회적 약자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확장하는 ‘생명정치’를 다층적으로 확산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열정이야말로 세월호 참사를 진정으로 기억하는 것이며, 남겨진 자들의 슬픔과 아픔을 책임과 연대의 사건으로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4142230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