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회-생각해보기

<칼럼> 박성준 - 사람의 꽃이 필 때까지

irene777 2016. 4. 27. 18:25



[별별시선]


사람의 꽃이 필 때까지


- 경향신문  2015년 4월 22일 -





▲ 박성준

시인·문학평론가



도종환 시인이 청주 흥덕구 선거구에서 제20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19대에서는 비례대표로 의정 활동을 했던 도종환 시인은 이번 20대에서는 지역구 선거를 통해 재선에 성공한 셈이다. 어쨌든 이로써 도종환 시인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문화예술계를 의원 한 명이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는 여야 모두 비례대표 후보 당선권에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았다. 게다가 공약집에도 그와 관련된 공약 한 줄 제대로 된 것이 없으니, 작금의 정치가 문화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배제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시인이 정치를 한다? 허무맹랑한 말만은 아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자.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이상국가를 위해 ‘시인 추방론’을 논했다. 그는 시인(화가)은 모방을 통해 세계를 재현하려고 하기 때문에 본질에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 불필요한 집단이라고 규정했다. 한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그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집단은 엄밀히 말해 ‘시인’이 아니라 ‘수사학자’였다. 당대 헬라의 청년들은 수사학을 통한 교육법에 매료돼 있었는데, 이 때문에 재현을 통해 진리의 접근을 차단하는 수사학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 있었던 것이지, ‘시인 그 자체’를 부정했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러니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과 <정치학>을 통해 문학의 효용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들을 시사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 이론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당대 청년들은 시(예술)를 사랑했기 때문에 플라톤은 끝끝내 시인을 추방할 수가 없었다. 그때가 아니라 지금의 관점에서 이 논의들을 이해해보면 어떨까. ‘시인(예술가)들이 살 수 없는 국가는 야만’이라는 것! 더 나아가 예술의 윤리적 관점을 이해하고 있는 시인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시인이 정치를 해야 한다? 이 말이 위험한가?


그럼 동양에서는 어땠을까. 송나라에서 시작된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9년(958년)에 유입돼 비로소 조선 건국 공신들이었던 사대부들에 의해 정착됐다. 이때의 과거제도는 창작된 시문을 통해 국가의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였다. 봉건 질서와 현재 풍토를 그대로 비교해서 논해볼 수는 없겠으나, 세습이 가능했던 음서제도에 반발하는 측면에서 과거제도를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즉 양인 신분 이상의 응시자에게 균등한 기회를 보장한다는 제도적 장치라는 것. 게다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정치를 해도 좋다는 생각이 과거제 내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용사(用事)의 활용이나 그 유교적 의미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당대 시문은 글쓴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거울이었다. 다시 말해 선발된 인재의 ‘청렴도’나 ‘학문적 성취’, ‘삶에 대한 태도’를 시를 통해 가늠할 수 있다고 당대에는 믿었다.


이것이 지금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이를테면 우리가 어떤 정치인에 대해 의혹이나 혐의를 제기할 때, 여기 나열한 부분들이 거의 전부가 되고 있지 않은가. 측근비리, 본인이나 자식의 병역특례, 범죄이력, 납득이 되지 않는 재산 정도, 당선 전후로 달라지는 태도 등은, 어떨 때는 그간의 정치적 행보와 공약 수행 능력보다도 인물을 평가할 때 더 예리한 잣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정치인에 대해 능력과 정치관만큼이나 그들이 가진 윤리성을 여전히 평가하고 싶어 한다. 윤리적인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말이다.


여소야대 정국이다. 겉으로는 야당의 승리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4월16일. 여야 지도부는 당 차원의 세월호 추모제 참석에 관해서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선거철에는 하루 스무 곳도 넘는 지역구를 돌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했던 이들이 말이다. 정쟁이나 득실을 논하기 전에, 정치도 기본적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가운데 가능한 일이다.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되었는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이렇게 또 속으면서 지켜보기로 한다. 사람의 꽃이 필 때까지.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422205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