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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대엽 - 독재의 추억

irene777 2016. 7. 20. 03:10



[정동칼럼]


독재의 추억


- 경향신문  2016년 7월 14일 -





▲ 조대엽

고려대 교수 (사회학)



7월 초, 러시아 연방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대학 구내 호텔에서 아침잠을 깼다. 동해로 탁 트인 해변을 에워싼 캠퍼스가 눈부시게 펼쳐졌다. 그런데 경이로운 대학의 풍광을 거스르는 존재들이 있었다. 정장 차림의 건장한 보안인력들이었다. 전날 회의장 로비에도 있었고 캠퍼스 곳곳에서 그들이 눈에 띄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3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스탈린주의의 잔영이 남은 것인지, 아니면 불안한 테러리즘의 시대에 대학 구내까지 치밀하게 대비하는 안전요원들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캠퍼스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과는 마치 잘못 끼운 퍼즐 조각처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연해주의 눈부신 아침 캠퍼스의 감상을 깨뜨리는 이 고도의 인지 부조화는 그리 오래지 않은 한 시대의 ‘추억’으로 이어졌다. 유신의 추억, 신군부의 추억, 엄혹했던 독재의 추억이 거기 있었다.


7월은 민주공화국을 천명한 제헌의 달이다. 이 7월의 대한민국에 유신의 추억, 독재의 추억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그 추억을 일깨운 장면 세 가지만 보자.


세월호 참사 때 청와대 홍보수석의 KBS 뉴스개입이 언론 통폐합과 보도지침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또 하나, 집시법 위반으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징역 5년과 벌금 50만원을 선고한 것도 노동탄압을 일삼던 독재의 추억을 일깨운다. 세 번째 추억의 소재는 이른바 청와대 ‘서별관회의’다. 경제 관련 핵심관료들이 모여 분식회계로 분탕을 친 기업의 정상화를 위해 기록도 근거도 없이 4조2000억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는 그 회의다. 한 언론은 이 회의를 “철저한 비밀주의로 임명직 관료 몇 명이 국가경제를 일방적으로 결정한 뒤 어떤 책임도 없이 밀실로 숨어버리는 구조”라고 했다.


청와대의 위헌적 뉴스개입, 노조지도자 탄압, 청와대 서별관의 밀실회의보다 더 생생하게 독재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런 사태가 난 후에도 법적·정치적 책임과는 동떨어진 당사자들의 오만한 행태다. 헌법 위반을 자행한 전 청와대 홍보수석 이정현 의원은 뭐가 문제냐는 듯 당대표에 출마한다고 하고, 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은 천연덕스럽게 이 같은 위헌적 행동이 홍보수석 본연의 임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청와대에 모여 “화기애애한” 오찬을 즐겼다. 대통령이 불러주길 목 빠지게 기다리던 여당 의원들을 몽땅 불러들여 “의원들과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온 언론이 온통 박 대통령과 유승민의 ‘35초간 대화’나 이른바 “완벽한 회동”에만 관심이 있었다. 참으로 완벽하게 국민 없는 파티였다.


민주공화국에서 가능한 일들인가? 우리는 1987년 직선 대통령제를 되찾았다. 이것을 학자들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보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경제민주화와 같은 실질적 민주주의는 그다음의 과제로 여겼다.


그러나 형식과 내용이 분리된 것이 아니듯 절차적인 것과 실질적인 것도 분리돼 있지 않다. 이것이 선후의 문제도 아니다. 게다가 선거제도, 말하자면 직접선거만 있으면 절차적 민주주의를 갖춘 것으로 보는 것도 일종의 환상이다. 언론의 편집과정도 절차고, 법원의 판결도 절차다. 서별관이든 동별관이든 관료들이 모인 회의도 절차다. 이 절차들 속에 시민의 삶이 있다. 이 절차의 민주성 속에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누리는 시민이 있고, 이 절차의 일관성 속에 노동자의 삶이 보장되고, 이 절차의 정당성 속에 어려운 살림을 쪼개 세금을 내는 시민의 삶이 있다. 세분되고 미시적인 모든 법적 제도적 절차는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이다.


제도적 절차가 비정상적이고 왜곡되게 운영되는 곳에 시민의 삶은 뒤틀리고 배제된다. 그곳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고 실질적 민주주의 또한 당연히 없다. 그래서 절차가 갖춰지지 않고 절차를 범하는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직접 선출한 대통령과 직접 선출한 국회의원이 하는 정치라서 민주주의가 됐다라는 생각은 거대한 착각이고 위험한 방임이다. 무엇보다도 선출된 권력이 법과 제도를 구성하는 모든 절차를 제대로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동시에 이러한 절차를 지키지 않는 위임권력의 운영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민주주의다.


책임은 권력에만 부여된 것이 아니다. 시민들도 권력자들이 수행한 절차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책임을 묻는 시민의 존재야말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시킨다. 그래서 책임을 묻는 시민이 없는 현실도 또 다른 독재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7월의 대한민국에 독재가 추억이 아니라 점점 더 뚜렷한 현실이 되고 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142045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