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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상희 - 대통령의 국기 문란

irene777 2016. 9. 3. 13:15



[정동칼럼]


대통령의 국기 문란


- 경향신문  2016년 8월 21일 -





▲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이 말은 시민혁명으로 쫓겨난 국왕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통치하는 자는 군림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부가 행사하는 권력은 그 자체로 국민의 복종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보다 상위의 가치 혹은 그 이상의 권위로부터 정당성을 확보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관통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한 우리 헌법처럼 통치하는 정부의 권력은 군림하는 국민의 권위를 넘보아서는 안된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담긴 건국절 논란은 과거 나치 정권에 종사했던 카를 슈미트만큼이나 이 말에 반발한다. 국가사회주의를 지지했던 슈미트는 권위와 통치를 구분하는 서구의 정치적 전통을 비판하며 총통의 지도력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자 했다. 건국절 주장 또한 이를 답습한다. 주권자인 국민을 제쳐버리고 통치권력에 모든 권위를 결착시켜, 결국에는 통치하며 군림하는 절대존재를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다.


기미년의 3·1운동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며 민족자결의 정신에 터 잡아 대한국민이 그 주권자임을 선언한, 우리 헌정사 최대의 사건이다. 그래서 그것은 서울대 한인섭 교수의 발견처럼 3·1“혁명”이며, 상해임시정부는 그 숭고한 결과물이 되어, 우리 헌법의 전문에까지 담겨 있게 된다.


그런데 건국절 주장은 이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해방 직후의 한반도에 오직 존재했던 것은 이승만의 ‘지도’하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창조해낸 단호한 “정치적 결단”뿐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며 민주공화국에다 국민주권의 나라임은 1948년에 제정된 헌법이 그리 규정하였기에 그리되었을 따름이라는 공허한 변론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은 이승만 정부가 만든 것이며, 그들이 행사한 권력이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국민”(헌법 전문)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창출한, 그들만의 어떤 것일 따름이다. 여기서 주권자로서의 국민은 오로지 통치 대상으로서의 신민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결국 이 주장이 제거한 것은 우리의 현대사뿐 아니다. 그것은 3·1혁명으로 확인된 국민주권이라는, 숭고한 역사적 명령까지도 없애버린다. 나아가 특정인을 국부로 내세우며 그의 모든 권위와 권력을 현재의 대통령에게 세습하고자 한다.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그 자체가 되어 국민 위에 군림하며, 그와 동시에 행정부의 수반이 되어 국가를 통치하는 절대국가 체제를 추구하는 것이다.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는 이 완전체로서의 신성국가를 만들기 위해 필수적으로 동원되는 전략무기에 다름 아니다.


대통령이 일개 민정수석에 관한 문제에까지 국기 문란을 거론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것은 우병우 구하기의 일환인 동시에, 절대권위에 흠집나는 것에 대한 권력자의 짜증 내기에 다름 아니다. 최고의 권위는 무결점의 완전체여야 한다는 말은 역으로 사소한 흠결만으로도 그것이 무너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초월적 권위가 가지는 본질적 한계다. 박 대통령이 개인비리에 불과한 사건을 대통령 흔들기로 간주하고 이를 국기 문란으로 표현하는 것은 절대권력의 이런 한계를 인식한 자기방어술인 셈이다.


실제 대한민국의 국기 즉, 국가의 기본토대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고 선언한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이런 의지를 정면에서 배신한 것이다. 스스로를 국가처럼 국민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보려는 대통령의 생각과, 권력의 원천인 권위와 그 권력의 행사인 통치권은 절대 분리되어야 함을 명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완전히 상극의 대립개념이기 때문이다. ‘대일본제국은 천황이 통치한다’로 시작하는 군국주의 일본의 제국헌법과, 나치체제에 대한 뼈를 깎는 반성에 터 잡아 “인간의 존엄은 불가침이다”로 시작하는 전후 독일의 기본법의 차이만큼이나 양자는 다른 것이다.


우리 헌법은 일관되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규정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태까지 그 의미를 상해임시정부가 터 잡았던 대한민국임시헌장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라는 규정에서 추출해 왔다. 하지만 건국절을 꺼내며 국기 문란을 외치는 대통령의 목소리에는 이 같은 대한민국의 기본토대가 송두리째 빠져 있다.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라지만, 우리 헌법은 이렇게 혼이 사라지고 형(形)조차도 망그러져 권력만이 난무하는 국기 문란의 헌법이 되어 간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212059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