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회-생각해보기

<칼럼> 이진석 - 김영란법과 새치기 진료

irene777 2016. 9. 3. 15:22



[정동칼럼]


김영란법과 새치기 진료


- 경향신문  2016년 8월 28일 -





▲ 이진석

서울대 의대 교수



진료나 입원 순서를 앞당겨 달라는 청탁이 김영란법 적용대상이 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음 한구석이 뜨끔했다. 예방의학 전공이라서 환자 진료를 하고 있지 않지만, 나도 심심찮게 환자 청탁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의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환자 청탁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의사는 4%에 불과했다. 그만큼 환자 청탁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환자 청탁이 모두 진료나 입원 순서를 앞당겨 달라는 것은 아니다. 위의 설문조사 결과도 진료나 입원 순서를 앞당겨 달라는 청탁은 전체의 15%에 불과했다. 절반 이상은 “진료를 잘해 달라”고 담당 의사에게 말을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실제 나의 경험을 봐도, 대다수의 청탁 내용은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진료나 입원 순서를 앞당겨 달라는 친·인척 혹은 지인의 부탁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위중한 환자는 차라리 낫다. 진료 의사에게 부탁할 명분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난감한 경우는 예약 순서대로 진료하거나 수술을 해도 하등 문제가 없는 환자이다. 그러나 이럴 때도 신경을 써 주는 시늉은 해야 한다. 의학적으로는 아무리 가벼운 병이라도 당사자에게는 급하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위중한 환자를 우선적으로, 그렇지 않은 환자는 선착순으로 진료하는 것은 상식이다. 사회의 규범과 윤리로 이런 상식이 지켜졌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진료나 수술 순서를 정하는 것까지 법으로 규제하느냐는 볼멘소리도 있다. 그러나 자율적 규범과 윤리에만 의존하기에는 관행과 인지상정의 골이 너무 깊다.


김영란법은 아픈 것도 서러운데 연줄이 없어 새치기까지 당하는 환자의 분통을 풀어주고, 난감한 청탁을 받은 의사에게는 거절의 명분을 제공한다. 그것만으로도 상식적인 진료 문화 정착을 위한 김영란법의 의미는 크다. 그러나 김영란법만으로 새치기 진료 관행이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새치기 진료가 모든 병·의원의 문제는 아니다. 소위 빅5 병원, 넉넉하게 쳐도 전국 수십여개의 대형병원에나 해당하는 문제다. 다른 병·의원은 새치기 진료가 있더라도 빈도가 미미하거나 다른 환자에게 별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대형병원에서 새치기 진료가 빈번한 이유는 순서대로 기다리기에는 내 앞의 줄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병실이 비지 않아 응급실에서 며칠 밤을 새우거나, 하루가 급한데 수술 날짜가 몇 달 후로 잡힌다면, 누구라도 연줄을 통해 새치기할 생각을 갖게 된다.


위중한 환자만 대형병원을 이용한다면, 굳이 새치기할 생각을 가지게 될 만큼 줄이 길지는 않을 것이다. 대형병원 환자들 중에서 해당 병원의 진료가 필요한 위중 환자는 기껏해야 30~40%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증 환자의 대형병원 이용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에 맡길 문제가 아니다. 고도의 의료자원과 기술이 집적된 대형병원은 필요에 맞게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 경증 환자 진료에 자원과 기술을 소진해 버리면, 정작 위중한 환자의 진료에 차질이 생기고, 심하면 생명까지 위협하게 된다. 비싼 진료비를 낼 경제적 능력이 있다고 해서, 경증 환자가 대형병원을 이용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대형병원이 경증 환자 진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첫째, 제도적 보장이 필요하다. 현재는 아무리 가벼운 환자라도 대형병원이 진료를 거부하면, 의료법 위반으로 처벌받는다. 급성기 치료가 끝나서 대형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을 필요가 없는 환자가 병실을 차지하고 있어도, 이를 제재할 권한과 수단도 없다. 선진국에서는 경증 환자의 대형병원 진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의료전달체계와 의학적으로 불필요한 의료이용에 대해서는 일체의 혜택을 중단하는 건강보험 급여정책 등으로 대형병원이 경증 환자 진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둘째는 재정적 보장이다. 현행의 건강보험 수가체계에서는 대형병원도 박리다매 진료를 해야,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대형병원의 역할 정립을 유도하기 위한 인센티브가 일부 있지만, 새 발의 피 수준이다. 위중한 환자를 진료할수록 이익을 얻고, 경증 환자를 진료할수록 손실을 보도록 대형병원의 수가체계를 대폭 개편해야 한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약한 연줄을 통한 공공연한 청탁은 줄어들겠지만, 센 연줄을 통한 은밀한 청탁은 여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김영란법의 한계는 아니다. 새치기 진료의 범인은 김영란법 너머에 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282043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