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사회-생각해보기

<곽병찬 편지> 유신 복제율 90%와 ‘미생 대통령’

irene777 2014. 11. 20. 04:49



유신 복제율 90%와 ‘미생 대통령’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81


- 한겨레신문  2014년 11월 10일 -




▲ 곽병찬 대기자



2년 채 안된 기간에 유신시대에 가까운 ‘총체적 퇴행’

이 나라 현실은 주권, 국가 안보, 국민경제까지 ‘미생’




▲ 검찰의 민변 변호사 징계 요구는 과연 순수한 결정일까.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피고인인 

유우성(왼쪽 둘째)씨가 장경욱 변호사(맨 오른쪽)와 함께 지난 3월12일 낮 서울 서초동 

법원삼거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가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법은 권력의 시녀, 정치의 시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나, 본인은 법의 임무는 정의를 실현시키는 데 있는 것이라는 이상주의적 견해를 믿어왔습니다. 이번에 이 사건에 관여하면서 본인은 법의 기능에 대해 크게 실망하였고, 과연 법은 정치나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금 검찰관들은 나라 일을 걱정하는 애국학생들을 내란죄,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등을 걸어 빨갱이로 몰고 사형이니 무기징역이니 구형하고 있습니다. 증거도 없이 형식적 절차만으로 피고인들에게 사형까지 구형한다면 이는 우리의 기초적인 법 감정인 정의의 이념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재판이어서 결과적으로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법의 이념으로 처단하려는 ‘사법 살인’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1974년 7월11일, 강신옥 변호사는 민청학련 사건 1심 결심공판 마지막 변론을 통해 ‘사법 살인’ 가능성을 예고했습니다. 실제로 9개월 뒤인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민청학련의 배후로 조작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 선고를 확정하고, 정부는 선고 18시간만인 9일 사형을 집행했죠.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강신옥 변호사는 그날 법정을 나서면서 곧바로 체포당해 구속됐다. 변호인의 변론권은 형사 피고인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방어 수단. 유신정권은 그 변론권에 대해서까지 재갈을 물리려 한 것이었습니다. 강 변호사를 구속시킨 박정희는 훗날 유신체제의 2인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당합니다. 공교롭게도 강 변호사는 김씨의 변호인으로서 박정희의 지저분한 인생 말년을 가장 가까이에서 톱아보는 구실을 할 수 있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5공 마지막 해인 1987년 9월 구속당합니다. 거제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그는 이상수 변호사와 함께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제3자 개입 등의 혐의로 체포됩니다. 법원은 검찰의 영장 청구를 거듭 기각했지만, 정권의 서슬에 밀려 결국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11월엔 검찰의 징계 요청에 따라 대한변협은 그에게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1년여 뒤 노 변호사는 국회의원이 되어,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을 심문합니다. 시종일관 답변을 회피하거나 뻔뻔한 변명을 늘어놓는 증인 전두환을 향해 결국 그는 명패를 집어 던집니다.


유신의 배에서 태어난 게 5공이었으니, 둘을 나누는 건 부질없습니다. 두 정권은 광주대단지 등으로 쫓겨난 도시빈민의 입을 틀어막고, 저임금과 인권유린에 항의하는 노동자의 입을 틀어막고, 그들의 편에서 실상을 전하려는 학생들의 입을 틀어막고, 양심적인 지식인의 붓을 꺾고, 신부, 목사, 승려 등 종교인의 입을 틀어막고 구속시켰다. 결국 마지막 조력자인 변호인의 입까지 틀어막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독재정권이 내부적으로 붕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말기적 현상에 불과했습니다.


이 정부의 검찰은 지난달 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 변호사 7명을 징계해달라고 대한변호사협회(변협)에 신청했습니다. 쌍용차 희생자들의 집회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악랄한 대공 수사로부터 공안 피의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세월호 시위 참가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변호사들이었다. 비록 구속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쌍용차 희생자의 집회와 관련된 권영국 변호사 등 5명은 이미 검찰에 의해 기소된 터였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따라 행동하는 변호사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유신과 5공의 전형적 단면입니다.


권 변호사는 지난달 30일 공판에서 이렇게 호소했습다. “…집회의 일차적인 목적은 바로 경찰력의 남용으로 인해 집회 금지 장소가 되어버린 화단 옆과 앞의 장소도 집회의 자유가 살아 숨쉬는 민주주의의 자유로운 공간임을 확인하고 이를 시민들과 공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재판은) 경찰과 물리적 충돌 여부를 따지는 협소한 송사가 아니라 국가가 공공복리와 질서유지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했을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기준을 세우는 재판이 되길 바랍니다.”


징계 요청이 어떻게 귀결되고, 법원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는 미지수입니다만, 이 정권의 의지만은 분명합니다. 기소하지도, 기소할 수도 없는 변호사들까지 징계를 요청했으니까요. 오히려 유신의 철권통치보다 더 집요합니다. 하긴 ‘유신 공주’와 ‘유신의 산파’가 만났으니 다른 선택이 있을 리도 없을 것입니다. 유신을 기초한 김기춘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이 정권은 유신의 자궁 속으로 신속하게 퇴행합니다. 대통령을 ‘윗분’이라고 칭하는 그는 ‘대통령이 눈을 뜨면 출근이요, 잠이 들면 퇴근’이라는 어록을 남겼으며, 대통령의 고가 헬스기구까지 국가 안보와 직결된 물품으로 올렸습니다. 유신의 청와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홍원 국무총리는 지난 5일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우리나라 표현의 자유가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국경 없는 기자회의 발표를 보면 표현의 자유 보장 수준이 세계 57위로, 노무현 대통령 시절보다 26계단이나 추락했다’는 서기호 의원의 추궁에 “평가 방법에 따라 다르다”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발언만큼 이 정권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것은 없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보기에 ‘국정 운영을 방해할 정도로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 심’하고, 또 유신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표현의 자유가 도를 넘어섰을 겁니다. 그들은 이미 유신의 태반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미생의 유신!  


이제 이 정권의 유신체제로 자가 복제율은 90%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 위해선 물리적 폭력성을 강화하면 될 뿐입니다. 물론 이 나라가 티케이(대구경북) 혹은 60대 이상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니 쉽게 이룰 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2년도 채 안 된 기간에 이룩한 퇴행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 남은 3년 이상의 임기를 감안하면, 민주주의와 민생, 한반도 평화와 국민 행복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퇴행이 불가능하지도 않아 보입니다.


요즘 최고의 검색어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린 ‘미생’. 이 나라의 당면한 현실 또한 미생입니다. 주권도 미생이요, 국가 안보와 국민 안전도 미생이요, 국민 경제도 미생이요,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 자체가 유충 상태 곧 미생이다. 유신 회귀를 꿈꾸는 미생의 대통령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퇴행시킬 줄이야, 미생의 국민 탓일까요?



- 한겨레신문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