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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편지> 누구를 위한 대통령인가? 국민인가, 상시인가

irene777 2015. 1. 13. 17:42



누구를 위한 대통령인가? 국민인가, 상시인가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90


- 한겨레신문  2015년 1월 12일 -




▲ 곽병찬 대기자



  신년 회견은 국민들이 그동안 수없이 당한 ‘지록위마’의 결정판

잇따른 의혹에도 김기춘·문고리 3인방에게 무한한 신뢰 보내

측근들이 대통령 보좌하는가, 대통령이 측근들을 보좌하는가




▲ 박근혜 대통령이 12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모두발언 보다가 꺼버렸어… 할 말이 없어.” “다른 일 때문에 띄엄띄엄 보느라 잘 모르겠어… 언론은 좀 비판하겠던데.” 오랫동안 대통령과 동고동락을 했던 새누리당 의원들이 오늘 신년 기자회견을 보고 나타낸 반응들입니다. “나는 노 코멘트, 말 안 해.” 한 당직자의 말은 새누리당 사람들의 심정과 처지를 잘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지간하면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할 텐데, 한 마디 하기가 힘들었던가 봅니다.


누구보다 ‘새’ 된 사람은 김무성 대표였습니다. 김 대표는 어제 대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통령은 굉장히 고생하는데, 밑에 사람들이 잘못 모셔서 요새 대통령께서 머리 아파 죽으려 한다. … 나부터 대통령을 잘 지키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나 대통령은 ‘밑에 사람들’ 때문에 전혀 머리 아파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김 대표가 지목했을 법한 사람들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표시했습니다.


비서실이 난장판이 되도록 방임한 김기춘 비서실장에 대해서는 ‘정말 드물게 보는, 정말 사심이 없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비서실장의 지시도 거역하면서 사표를 내던진 김영한 전 민정수석에 대해서는 “항명이 아니라, (국회에) 나갔다가 … 문제를 더 키우지 않을까, 문건 유출에 책임지고 나간 분으로 관대하게 이해했다. 이른바 ‘문고리 권력’들에 대해서는 특히 단호했습니다. “묵묵히 고생하면서 자기 맡은 일을 하고… 그런 비서관을 의혹을 받았다는 이유로 내치면 누가 제 옆에서 일할 수 있겠는가.” 제 몸처럼 그들을 감쌌습니다.


대통령의 생각이 그런데, 밑에 사람들의 잘못 운운한 김 대표는 그야말로 쪽박만 차게 됐습니다. 찌라시 작성해 유출시킨 음해세력으로 매도되지만 않으면 다행일 겁니다. 소감을 묻는 말에, ‘대변인에게 들어봐, 내가 무슨 이야기를…’이라고 꼬리를 감춘 것은 그런 형편의 반영일 겁니다. 신년 회견을 계기로 청와대 비서실의 난맥을 처리하고, 국정 운영의 부담을 덜 수 있기를 바라던 이들은 흙탕물을 흠뻑 뒤집어쓴 셈입니다.




▲ 김기춘 비서실장 등 청와대 참모진이 12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지켜보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그러나 진짜 모욕을 당한 건 국민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바보 천치가 되어야 했습니다. “문건 파동과 관련해서는 검찰에서 어떤 과학적 기법까지 총동원해서 철저하게 수사를 한 결과 그것이 모두 허위고 조작됐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걸 믿으라고요? 지난 한 해 무수하게 당했던 ‘지록위마’의 결정판이었습니다. 검찰이 수사랍시고 한 건 세 비서관이 이미 결론을 내리고, 당신이 하달한 지침에 맞춰, 삼류 소설을 쓴 것뿐이었습니다.


<세계일보>가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의혹을 보도한 지난 11월28일 ‘십상시’로 거명된 청와대 비서진은 세계일보 기자와 경영진 등 6명을 고소했습니다. 소장 등을 통해 청와대는 민정수석실 문건을 ‘시중의 풍설을 모은 찌라시’라고 규정했고, 사건의 성격을 ‘청와대 문건 유출 국기문란’으로 정리했습니다. 이후 찌라시는 민정수석실 감찰 문건에 대한 공식 호칭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 뜻을 받든 것인지, 12월1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통령은 국기문란 행위에 대한 엄단을 지시했습니다. 막 수사를 개시한 검찰에 주는 ‘가이드라인’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 못미더웠던지 12월7일 대통령은 새누리당 지도부 등을 초청한 오찬 자리에서 “찌라시 얘기에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그렇게 거듭 규정하는데 검찰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비서진의 정리와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써내려간 것이 검찰 수사 결과였습니다. 그것을 두고 과학적 수사 기법 운운했으니 ‘개콘’보다 더 웃기지 않습니까?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국정원, 경찰, 군 등 이 나라의 최고 정보기관이 정제한 정보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 곳을 두고 ‘찌라시 공작소’라고 한다면, 이 나라, 아니 이 정부는 아예 문을 닫는 게 낫습니다. 그런 정부, 그런 청와대를 믿고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 문건들이 외부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이미 4월께부터 비서실장과 문제의 세 비서관이 알고 있었습니다.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은 청와대에서 해임된 뒤에도 유출된 문건 100여건을 부속실에 전달했습니다. 그때 모른 척 뭉갠 사람들이 바로 오늘 대통령이 절대적 신임을 확인한 바로 그 당사자들입니다.




▲ 김영한 민정수석(왼쪽 둘째)이 12월1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발언하는 동안 눈을 감은채 생각에 잠겨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이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대통령이 측근들을 보좌하는가, 측근들이 대통령을 보좌하는가. 대통령의 측근들인가, 측근들의 대통령인가. 물론 김기춘 비서실장은 그 대상에서 빠질 겁니다. 그는 민정비서실의 보고서를 대부분 봤습니다. 자신의 퇴진 공작 의혹에 대해서도 감찰 지시를 했고, 또 감찰 결과를 받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조처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이른바 문고리 권력은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청와대의 성역이었습니다. 김영한 민정수석은 그의 지시를 정면에서 거부하고 대신 사표를 던졌습니다. 그는 어쩌면 문건에 등장한 표현처럼 ‘검찰의 기강이나 잡는’ 진돗개였을지도 모릅니다.


대통령은 헌법상 최고결정권자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의 마음과 정신을 움직이는 건 본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대통령은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린 자들을 위해 온몸을 던지고 있습니다. 국정 농단이나 권력 암투 의혹이 잇따랐는데도, 이들을 방어하는 데 저의 도덕적 권위를 모두 던져버리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누군가의 민원을 듣고는, 유능한 문화체육관광부 체육국·과장의 경질을 직접 챙기기도 했습니다. 보고서가 선별되고, 사람이 선별되고, 여론이 선별되는데도 그 선별하는 이들에 대해 ‘온몸을 던져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라고 감쌉니다. 결국 이번 청와대 파동의 한가운데에 세 사람이 있는데도, 오히려 그들은 금단의 영역으로 성역화됐습니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보필하는가? 오늘 회견 모두발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집권 3년차를 맞아 그동안을 돌아보면, 저는 국가 경제를 살리고 국민들의 삶이 나아지도록 하기 위해 한순간도 마음 놓고 쉰 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 앞으로도 남은 임기 동안 국민과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나가겠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지금 이대로 앞으로 3년이나 더…. 그것이 오히려 본인과 국민을 더욱더 괴롭히는 건 아닐까 뒤집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 한겨레신문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