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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경집 - 동물농장의 경고

irene777 2016. 7. 23. 23:09



[김경집의 고장난 저울]


동물농장의 경고


- 경향신문  2016년 7월 21일 -





▲ 김경집

  인문학자






다루기는 돈이 제일 편하고 쉽다. 대신 돈으로 대학은 타락한다. 대학은 국가 교육의 최상위 교육단위다. 그런데 정작 근본적 구조개혁은 외면한다. 전임교수 강의 비율을 높이라고 한다. 옳은 일이다. 그러려면 교수 수를 늘려야 한다. 하지만 그건 돈 드는 일이니 생각도 않는다. 대신 강사들이 맡았던 수업들을 상당 부분 전임교수들이 맡는다. 알량한 수입에 목매달던 강사들은 실업 신세다. 시니어 교수들이 21시간 넘게 강의도 한다. 전임교수가 맡는 수업비율은 높아지지만 내용은 엉망이다. 강사들이 맡던 수업보다 못하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따르지 않으면 제재가 가해지거나 돈을 주지 않으니 따를 수밖에 없다. 대학들도 마다할 일 아니다. 이참 저참 잘됐다 여기는 학교들도 많다고 들었다. 대학의 프라임사업도 그런 틀에서 기본적으로 같은 궤에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도 그가 관여했다. 문제의 발단도 역사교과서 국정화 과정 논란이었다. 아마도 그런 공적(?)으로 고속 승진했을 거다. 다양성의 시대에 국정화는 시대착오다. 게다가 역사는 답이 정해진 게 아니다. 해석의 다양성이 역사 의미를 키운다. 과학과는 달리 역사는 고정된 게 아니다.(과학조차 고정된 게 아니다!) 그런데 역사를 하나의 시선과 해석으로 가두려 한다. 그게 교육이고 교육부의 사명인가? 스스로도 부끄러운지 집필진은 여전히 캄캄한 어둠에 숨어있다.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참여를 거부했다. 그걸로 이미 본질이 확연해졌다. 그런데도 비전공자들까지 공모해서 끼워 넣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그 반대일 확률이 훨씬 더 높다. 효도는 개인적으로 할 일이다! 그런데도 그걸 주도하면서 소명의식이나 사명감을 가졌다면 그건 단지 인지부조화일 뿐이다. 아니 그건 출세에 대한 강한 후각을 가진 자들의 뛰어난 본능적 선택이었을 뿐이다. 삐뚤어진 역사관으로 99%를 개·돼지로 공고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도 되지 않는 변명이나 강변을 궤변이라 부른다. 도리에 맞지 않는데 도리에 맞는 것처럼 억지로 꾸며대는 말이다. 진실은 없고 교언과 허언뿐이다.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분명히 공약했다. 당선 직후에도 당당히 말했다. “보육사업 같은 전국 단위의 사업은 중앙정부가 책임지는 게 맞다.” 2013년 전국시·도지사 간담회였다. 선거에서 그 공약으로 표를 얻었다. 그러나 ‘증세 없는 복지’와 모순된다. 결국 재정난을 핑계로 시·도교육청에 떠넘겼다. 대통령은 뜬금없이 교육청의 이기주의를 비난했다. 적반하장이다. 유체이탈 화법의 상습범이다. 누리과정 예산을 시·도교육청 의무지출 경비로 못 박는 개정령안을 내놓았다. 교육청은 예산 편성도, 집행도 못한다. 난감하기 그지없다. 미래를 떠안아야 할 아이들과 학부모들만 피해를 입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아이 둘 키우는 데 한 달 평균 128만원 든다(경향신문 7월18일자 보도)고 한다. 없는 살림에 버거운 비용이다. 1%에게는 껌값이겠지만. 그런데 여전히 나 몰라라로 일관한다. 자신의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유발한 한 인물의 문제발언이 아니다. 파면 요청으로 가라앉을 문제가 아니다. 차제에 이 나라 교육현실에 대한 심층적 분석과 비판, 그리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어느 신문에도 그런 후속 기사는 없다. 그렇게 잊고 싶은 것일까? 파면이 확정되거나 무산되면 그때 잠깐 시끄럽고 말일일까? 이러니 ‘개·돼지’라는 말을 듣는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뿌리 뽑아야 한다. 미봉으로 그칠 사안이 아니다.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논란의 핵심 문제를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주물렀고 그걸로 승진한 인물이다. 그 한심한 발언에만 흥분할 게 아니다. 그런데도 이미 논란은 끝난 듯 보인다. 두렵다. 이런 현실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러시아혁명과 스탈린의 배신을 풍자한 정치우화다. 스탈린의 독재를 매섭게 질타한 소설이다. 그런데 두렵게도 이 소설의 풍자가 비단 그 당시만 해당되는 게 아닌 듯하다. 인간의 수탈을 참지 못해 동물들이 존스 농장주를 추방한다. 혁명이다. 그야말로 개와 돼지의 반란이다. 참다못한 동물들이 힘을 합쳤다. 오웰의 이야기는 권력을 장악한 돼지 계급의 타락을 고발한다. 혁명을 예언한 메이저 영감은 마르크스를 상징한다. 돼지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빗댔다. 함께 반란을 일으킨 돼지 스노볼은 트로츠키를 의미한다. 주인만 바뀌었을 뿐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돼지들의 권력 독점이 더 추악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개와 돼지가 주동이 되어 권력을 빼앗는 장면에 주목한다. 마음껏 유린하고 조롱하는 대상들이 언제나 복종하는 건 아니다. 그걸 잊으면 안된다. 민심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선현들의 가르침이 새삼스럽다. 대중을 개와 돼지로 표현한 나 아무개는 말했다. 그들은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99%들에게 먹고사는 것이라도 해결해주고 있는가? 그거라도 하면서 주절거렸으면 모를까. 오웰은 말한다. 동물농장에서 돼지와 개를 제외한 동물들은 배고프다고. 그렇다면 지금 배고프지 않은 그들, 나 아무개가 그토록 꿈꾸던 1%가 바로 개와 돼지가 되는 셈인가?


각성해야 한다. 나만 배부르다고 세상 우습게 보면 큰코다친다.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도 못 막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공정함과 정의는 강자가 솔선하는 가치다. 그 가치를 바로 세우는 게 교육이다. 교육경험도 없이 관직 요직만 차지하며 권력을 휘두르던 자가 어디 나 아무개 하나뿐일까. 천박한 교육철학부터 추방해야 한다. 비열한 구조조정, 한심한 역사교과서 국정화, 기만과 발뺌의 누리예산 등을 철저하게 다시 따져야 한다. 다 허물고서라도 다시 세워야 한다. 그게 국가의 백년대계다. 이제는 그토록 멸시하던 개·돼지의 세계로 하강한 나 아무개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동물농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212113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