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헬조선, 청년세대, 그리고 위험한 말들
- 경향신문 2016년 9월 11일 -
▲ 류웅재
한양대 교수,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영화 <분노의 포도>란 작품이 있다.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1940년에 각색된 미국 영화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영화는 당시 미국 사회가 처한 어려운 시대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분노에 관한 것이 큰 줄기를 이룬다.
그런데 이 작품이 ‘지금 이곳’의 우리 사회에 던지는 놀라우리만치 유효하고 보편적인 함의 중 하나는 계급 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인간의 인성이나 도덕의 문제로 환원하기보다, 개인들이 처한 상황과 구조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작품은 좌절하고 절망한 주인공이 깨닫는 것처럼, 명령을 내리는 자도, 책임지는 자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는 조르조 아감벤과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경제 발전의 부산물인 ‘호모 사케르’, 또는 인간 쓰레기의 생산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격적이고 기술적인 문제가 가진 특징들과 연관됨을 보여준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회 지도층의 시대착오적인 무감각한 말과 행태이다.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고 꿈이 이뤄진다’거나 ‘헬조선’이나 ‘흙수저’ ‘3포세대’ 등 이미 사회과학적으로 연구 대상이 된 유의미한 사회문화적 담론들을 자기비하와 비관이라 꾸짖는 대통령은 권력말기 누수현상을 차단해야 하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서민경제 관련 정책을 담당하는 정부부처의 책임자조차, 청년들에게 ‘자기 노력 없이 모든 걸 사회나 남 탓을 하는 일부 세태에 휩쓸리지 말고 우리나라와 자신에게 자긍심을 가지고 정진하라’고 할 때 느꼈던 감정은 분노와 참담함이 뒤섞인 것이었다.
그렇다. 대통령의 말처럼 우리 스스로 우리의 현대사를 부정하고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을 확산시킬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사회와 시대를 추동하는 패러다임이 불굴의 의지나 진취, 긍정과 도전의 정신만으로 대처하기엔 너무 많이 변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 사회의 발전 역시 온전히 산업화 시대를 살아낸 개인들의 불굴의 의지와 도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임을 용기 있게 직시하고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한류’로 총칭되는 우리나라의 대중문화가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한 이후로도 지속되고 있는 ‘후기 식민지성’에 빚지고 있는 독특한 혼성적 문화이듯, 한국 경제의 성장 또한 ‘압축된 근대화’라는 독특한 근대화 경험과 발전주의 모델에 기대고 있다. 이는 개인의 노력을 넘어서는 세계정세와 국제질서라는 구조적 요인을 전제하지 않고는 설명할 길이 없는 현상이다.
그러니 ‘헬조선’과 ‘흙수저’를 운위하는 청년들을 계도하기에 앞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도우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실제로 서울시와 성남시가 그런 노력을 정책으로 구현해내고 있으니 이를 벤치마킹하면 좋을 것이다. 최소한 정치적 계산에서 시대적 흐름에 부합하는 정책들에 훼방을 놓는 일은 없어야 한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11210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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