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임금님
여현호 논설위원
- 한겨레신문 2015년 1월 8일 -
▲ 여현호 논설위원
음식에도 유행이 있다. 1997년 이전만 해도 주변에서 짱뚱어나 매생이국을 즐기는 이는 별로 없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강남에 막 들어선 짱뚱어 전문 식당을 찾으면 기업인들과 정치 주변의 다양한 인사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다닥다닥 붙어 앉아 술잔을 기울이다 근처 고급호텔에 온종일 머무르면서 사람들을 만난다는 대통령 아들 이야기를 했다. 그를 통하면 자리건 사업이건 안 될 일이 없다는 귀엣말이 오갔다. 그렇게 몇 년간 ‘아는 사람만 아는’ 실세였던 김홍업씨는 김대중 대통령의 5년 임기가 끝나가던 2002년 7월 구속됐다.
2008, 9년에는 과메기를 내놓는 광화문 근처 식당이 문전성시였다. ‘만사형통’의 ‘영일대군’ 이상득 의원이 자주 이용하는 식당이라거나, 포항·영덕 출신 핵심 인사들이 대놓고 먹는다고들 했다. 방마다 들어찬 사람들은 실세라는 박영준씨가 부근 고급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사람들을 만나더라고 수군댔다. 이 의원은 동생인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말인 2012년 7월, 박씨는 그해 5월 구속됐다.
권력은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권력을 좇는 사람들은 권력이 즐기는 음식에까지 몰렸다. 먹으면서 이권과 대가도 나눴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실세의 존재와 힘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런 비밀이 ‘국민 모두가 다 아는’ 일이 되기까진 대개 4년 넘게 걸렸다. 박근혜 정부에선 2년도 채 안 걸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세가 도대체 누구냐’거나 정권의 의사결정구조를 두고 이런저런 풀이가 있었지만, 이제는 대통령 바로 옆의 ‘비서 3인방’이 총리나 장관, 심지어 비서실장보다 훨씬 강력한 ‘실세’라는 사실을 다들 안다. 누가 인사를 주무르는지, 만기친람 하는 대통령을 움직이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더 이상 ‘알 만한 사람들만 아는 일’이 아니다. 그만큼 몰려드는 사람도 많았으리라. 며칠 전 마무리된 검찰 수사는 3인방 등의 힘이 더 강해졌음을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권력투쟁이라면서 싸움의 한쪽엔 손도 안 댔으니 달리 볼 길이 없다.
청와대는 정치적 책임조차 거부한다. 검찰 수사로 비선 개입과 국정농단 의혹이 사실무근의 허위로 공식 확인됐으니 무슨 조처를 취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고 해서 현실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 정치에서 루머란 공식 부인되는 순간부터 사실로 믿게 된다는 말도 있지만, 이번 사건은 검찰과 청와대의 아니라는 손사래 너머로 의혹이 사실이라는 정황과 증거들이 너무도 선연하다.
권력은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다. “사람들에게 권력을 쥐었다는 느낌을 갖게 하면, 그들은 남의 관점을 취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자신의 생각을 중심에 놓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 결과 남들이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이해할 능력이 줄어든다. 무엇보다 권력은 남에게 무신경하게 만든다.”(로버트 트리버스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꼭 그런 모습이다.
권력 실세의 민낯이 온전히 드러난 것은 대체로 대통령 임기 말이다. 김영삼 정부의 소통령이라는 김현철씨도 임기 5년차에 구속됐다. 지금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2년도 안 됐는데, 주요 보수언론과 여당 일각에서조차 청와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변화와 쇄신을 요구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가능케 했던 “누구도 믿지 않지만 남들은 다 믿을 것이라고 모두들 믿고 입을 다무는” ‘다원적 무지’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겠다. ‘레임덕’의 시작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의혹과 사건은 끝났다고 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해 혼자만의 착각을 고집한다면 더 민망한 꼴을 겪게된다.
- 한겨레신문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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